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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Nov 06. 2018

이력서 쓰기

30일 시필사

무엇이 필요한가?

신청서를 쓰고,

이력서를 첨부해야지.


살아온 세월에 상관없이

이력서는 짧아야 하는 법.


간결함과 적절한 경력 발췌는 이력서의 의무 조항.

풍경은 주소로 대체하고,

불완전한 기억은 확고한 날짜로 탈바꿈시킬 것.


결혼으로 맺어진 경우만 사랑으로 취급하고

그 안에서 태어난 아이만 자식으로 인정할 것.


네가 누구를 아느냐보다, 누가 널 아느냐가 더 중요한 법.

여행은 오직 해외여행만 기입할 것.

가입 동기는 생략하고, 무슨 협회 소속인지만 적을 것.

업적은 제외하고, 표창 받은 사실만 기록할 것.


이렇게 쓰는 거야. 마치 자기 자신과 단 한 번도 대화한 적 없고,

언제나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해왔던 것처럼.


개와 고양이, 새, 추억의 기념품들, 친구,

그리고 꿈에 대해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지.


가치보다는 가격이,

내용보다는 제목이 더 중요하고,

네가 행세하는 '너'라는 사람이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네 신발의 치수가 더 중요한 법이야.

게다가 한쪽 귀가 잘 보이도록 찍은 선명한 증명사진은 필수.

그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보다는

귀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더 중요하지.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

이런, 서류 분쇄기가 덜그럭거리는 소리잖아.


「이력서 쓰기」,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최성은옮김, 『끝과 시작(문학과지성사)』



비스와바 쉼보르스키. 노벨문학상이 별건가 했다가 된통 크게 한 대 맞았다. 명치를 세게 때리는 이 시집의 특성 때문에 주로 고달플 때 꺼내 읽는다. 어떤 시에는 위트가, 어떤 시에는 공포가, 어떤 시에는 처절함이 있지만, 무엇보다 나와 비슷한 인간 군상들이 여기 모여 있다. 어떤 페이지를 열어도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그것이 은유와 상징, 우화로 쓰여 있다.


이 시만 봐도 임팩트 있고 짧게 쓰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모습. 게다가 서류평가, 1,2차 면접을 그렇게 최선을 다해 보면서도 회사에서 만나는 이상괴상한 사람들은 대체 무엇? 남들도 나를 그렇게 보겠지. (후후. 피차일반입니다.)


또 한번 무릎을 탁 치고 간다. 우울할 땐 시 한 편.


PS. 이력서 쓰기로 검색해 들어오는 사람들 있겠지....

 

#이력서쓰기 #비스와바쉼보르스카 #끝과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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