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시필사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저만치 앞서 가던
박새 한 마리 눈 위에 붙어 있는
자기의 그림자를 뜯어내어 몸에 붙이고
불쑥 날아오른다 그리고
허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워버린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허공이 눈부시다
발자국과 깊이, 오규원,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무척 좋아하는 시다. 시인은 자기의 자취를 돌아보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고 말한다. 박새는 눈밭에 그림자를 남기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좋아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좋아했다. 부처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기로 했는데, 결국 나는 개새끼 중생에 불과한지라, 그를 완벽히 사랑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거품을 내며 조금씩 작아져 흘러가버리고 마는 비누처럼.
오규원의 시에는 찰나의 결이 담겨있다. 죽음과 소멸에 이르는 시간이고 침묵의 시간이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지만,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소멸한다. 하지만 그 시간들도 순간은 눈부신 법이다.
#발자국과깊이 #오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