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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Jun 28. 2020

고3 아들의 진로계획서

수험생 학부모는 처음인지라

어제는 고3 아들과 진로 계획서를 작성했다. 며칠 전부터 말이 나왔던 것을 미루고 미루다(애미나, 자식이나) 늘 그렇듯 데드라인에 임박해 식탁에 마주 앉았다.


간단히 진로 이야기를 나누고 쓰는 줄 알았더니 수시는 7 지망, 정시는 3 지망, 희망 비인가 대학, 뒷장에는 비진학 계획까지 포함되어 구체적인 전형 방법까지 적어야 했다. 고3은 처음인 아들과 수험생 학부모가 처음인 나는 노트북을 앞에 두고 대학과 전공, 전형 방법을 검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들은 내신 4등급 언저리에 있지만, 그럴듯한 대학에 가고 싶어 한다. 아들 성적으로는 갈 수 없는 대학들이다. 성적은 별로고 꿈도 없는, 아들이 물었다.


“학교는 이런 걸 왜 써오라고 하는 걸까?”
“음, 주제 파악하라고?”
“아… 그렇구나.”


지인들은 아들이 고3이라고 하면, “아이고 힘들겠다”는 응원을 던지고, 그것도 모자라 “곧 끝난다”며 등까지 두드려준다. 솔직히 아들이나 나나 고3이 되었다고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들 나이를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고3이 아니라) 열아홉입니다.” 또는 “성적이 나빠서요. 딱히 힘든 것도 없어요.”라고 대꾸하게 된다.


한국에서 ‘고3’은 엄청난 관심을 받는다. 어떤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위해 달려가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부모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취미 과외, 학원을 중단시킨다. 진로를 미리 결정하는 가정도 있다. 이때부터 아이들에게는 입시가 시작된다. 은연중에 부모가 기대하는 대학이 아이의 목표가 되곤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대놓고 욕망을 드러냈다.

"엄마는 무조건 서울대야. 사회생활해보니까, 서울대 아니면 딱히 학벌이 필요한 거 같지도 않아. 대학 등록금이 투자라면! 서울대가 아닌 대학에 딱히 투자하고 싶지 않아.”


어린 시절부터 다소 독립적이었던 아들은 단 한 번도 서울대를 떠올리지 않았다. No영향. 중학교 가면 공부만 해야 한다는 게 싫다(누가 그래?!)며 비인가 대안학교로 진학해 농사를 주로 지었다. 그러다 보니, 또 공부가 하고 싶다며 이우고로 진학했다. 서울대를 떠올리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환경이었으리라.


딱 한번, 고등학교 2학년 초반 진로 희망서를 제출할 때, 본인의 진로 희망 칸에는 “교육 분야”라고 쓰고 학부모의 진로 희망 칸에는 “서울대 진학”이라고 써서 제출했다. 담임 선생님과 면담도 하기 전, 이런 첫인상이라니...


어쨌든 뚜렷하게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아들도 대학을 가고 싶고, 그래서 학교와 상담한다. 담임교사는 “수시는 어렵고(불가능하고) 정시에 도전해봐(노력해봐)”라고 말한다. 고3 팀장 선생님은 아들에게 “지금부터 노력해도 수능 점수 안 오를 거야. 별로인 대학이라도 진로 계획 세워 도전하기에는 수시가 나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화기애매하게 대학들을 알아봤다. 모의고사 점수를 입력해 모의 정시 지원도 해봤다. 커트라인을 보면서 우리는 현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고3 팀장 선생님에게 복수하자! 점수 올려서 복수하는 거야!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태도로 수시는 쓰지 않기로 우리끼리 합의 봤다. 대신, 엄청 노력해야겠지만 일단 10-15 정도를 높이는 선에서 정시 3 지망 목표를 세우기로. 2-3시간 만에 A4 한 장을 단 세 줄로 마무리하자니 이러려고 시킨 건가, 싶기도.


그래도 정시 3 지망만 쓰는 게 부담스러워서(수시는 아들의 내신으로는 가고 싶은 대학으로 갈 가능성 1도 없음) 안면 있는 아들 친구 엄마에게 톡 메시지를 보냈다. 진로계획서 써서 제출했냐고.


“우리 애는 안 써서 냈어요. 희망 전공이나 진로가 없대요.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보더니, “너는 알아서 대학가라”라고 했다네요.”


나쁘다. 학교는 입시를 책임지지 않는다. 교사들도 다른 전형, 새로운 대학, 새로운 전공에 도전하지 않는다. 제자들이 간 대학만을 떠올린다. 제자들의 입시 패스가 새로운 제자들의 노하우가 된다. 그런데 솔직히 원망도 없다. 학교가, 입시 전문 교습소나 입시 컨설팅 사무소는 아니니까. 이제 와서 후회다. 다른 엄마들처럼 내가 아들을 채찍질했어야 하나.


일단 우리 아들은 단 한 번도 대학 생활을 포기한 적이 없었으나 고3이 되면서 <수학의 정석>을 구입한 녀석이다. 그래서 좀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태평한 얼굴로 “그 뭐라더라, 수학의 정석? 수학 선생님이 그걸 보면 개념 이해가 쉽다고 하던데?”라고 말하며 서점에 다녀온다고 했었지.


또 고 1 여름방학에도 "애들이 어떻게 저렇게 잘 이해하지? 너무 궁금했는데 오늘 알았어. 인강이라는 것을 듣더라고!" 말해 나를 소름 돋게 했던 녀석이다.


+

아무리 느긋하게 마음을 먹어도, 왜 만사태평한 아들을 보면 가끔 화가 나는 걸까. 과연 우리는 복수하게 될까. 이런 어미 마음 티나지 말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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