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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Jun 29. 2020

낡은 문으로 통하는 이야기

이십 년도 지난 우리집, 내 방의 추억

6살부터 22살까지 성당에 살았다. 나는 어린 시절 컨저링 류의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귀신 보는 아이였다. 당시 집주인 할아버지가 천주교 신자여서, 그 사실을 아는 신부님에게 알렸고 김정직 신부님은 그런 나를 데려가 거처에 머물게 하였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새로 설립, 초대 부임하게 된 성당에 경비가 필요해 신부님은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데려왔다.


새로 문을 연 성당에는 본당이 있는 건물에 작은 집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가 경비 일을 맡으면서 우리 가족은 방 한 칸, 부엌, 화장실이 각각 딸린 그 독채에서 살았다. 그때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집 앞에 키우던 누렁이가 동네 큰 개에 물려 죽어 엄청나게 울었던 기억만 어렴풋이 난다.


성당에 신자가 늘면서 우리집이 있던 터에 부속 건물을 짓기로 했다. 집이 헐려야 했으므로 우리 가족은 임시 거처로 본당 밑에 있는 작은 기도실에 살았다. 기도실에는 싱크대가 달린 작은 주방이 있었고, 화장실이 없었다. 본당에 딸린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고, 가끔 싱크대에 큰 대야를 두고 목욕했다.


용도가 기도실이었으므로 방은 다소 어두운 벽지와 나무 바닥으로 마감되어 있었다. 한쪽 벽면은 전체가 붙박이 책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옷과 집안 물건들을 잔뜩 넣어두었다. 이불은 들어가지 않아 항상 방 어딘가에 놓여 있었고, 나와 언니는 이불 밑에 들어가 종종 장난을 치곤 했다.


책장에는 모든 물건이 있었고, 성당의 물건도 일부 들어가 있곤 했다. 하루는 성수통인지 모르고 안에 든 성수를 모두 비운 채 물총으로 쓰며 놀았다. 놀고 들어와 빈 성수통을 발견한 엄마에게 매를 맞았다. 예사 성수가 아니었다. 파티마에서 가져온 기적의 성수라고 했다. 지금이라면 물이라도 채웠을 텐데.


부속 건물이 완공된 후 우리 가족은 본당 교육실로 이사를 해야 했다. 교육실 3개와 중간 화장실이 있는 직사각형의 공간을 터서 만든 일자집이었다. 입구-방-주방-화장실-방 대략 이런 순서.


현관이기도 한 집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 먼저 아빠의 대기실이 나온다. 성당의 모든 열쇠가 모인 방이기도 하다. 여기서 신발을 벗고, 그 방향으로 걸어가 나오는 문을 열면 안방, 또 그 방향으로 걸어가 나오는 문을 열면 주방과 화장실, 또 그 방향으로 걸어가 나오는 문을 열면 언니와 나의 방이 있었다. 언니와 나의 방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는데, 그건 건물의 뒤로 나오는 문이었다.


아버지는 안전을 위해서였는지, 뒤편과 연결되는 문은 안에서만 열리도록 장치를 해두었던 기억이 난다. 디폴트로 잠가두었지만, 열려 있더라도 밖에서는 문을 열 수 없었다. 가끔 친구들이 놀러 올 때는 안방을 거치지 않고 뒤로 들어오게 하곤 했다.


언니는 성당에 사는 게 부끄럽다며 친구들을 집으로 부르지 않았다. 우리는 성당 신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성당의 모든 신자는 우리가 성당 경비원의 자식이라는 것, 또 성당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간혹 우리는 민낯을 아빠를 찾는 신자들에게 보여야 했다. 언니는 그것도 부끄럽다고 했다.


나는 성당이 좋았다. 큰 마당과 잘 손질된 나무, 복사들을 위한 작은 서재가 있었다. 특별한 날에는 성당의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용돈과 좋은 옷을 선물해주었다. 가끔 성당에 큰돈을 내는 신자분들도 질 좋은 물건들과 쓰지 않는 가구들을 우리 가족에게 주었다. 언니와 나는 일면 성당이 보살피는 아이들이었다. 언니는 그것도 부끄럽다고 했다.


성당은 신자가 더 늘었고 헌금도 많아졌다. 성당 뒤에 있던 가옥을 몇 채 사들였다. 그중 한 채는 친구의 집이기도 했다. 친구는 이사갔다. 몇 개의 집은 교육실이 되고, 그중 작은 집이 새로운 우리 가족의 집이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집이었다. 방 2개, 화장실, 마루, 그리고 작은 마당까지. 우리집으로 통하는 현관 문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22살까지 그곳에 살았다. 우리방은 침대 두 개가 기역으로 놓이고 각자의 책상과 옷장이 놓일 만큼 꽤 넓었다. 언니가 방을 치우지 않는다며 나를 쌀자루 위에 가두어 두었던 기억이 난다.


비가 오는 여름, 바닥에 누워 익스트림 노래를 들었던 일, 옷장에 붙인 연예인 브로마이드 사진을 밤에 보고는 귀신일 줄 기함했던 일, 침대에 누워 남자친구를 떠올리거나 미래의 워킹우먼이 된 나를 상상했던 일. 그리고 무엇보다 언니는 이 방에서 결혼해 우리를 떠났다. 언니는 결혼식 전날 밤 “나는 평생 내 방을 갖지 못하는구나"고 말했다.


약 8개월이 흐른 후 나 역시 그 방을 떠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성당의 경비일을 그만두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2주 후에 엄마와 나는 가구는 모두 버리고 몇 되지 않는 짐을 실어 가까운 빌라로 이사갔다. 엄마는 살짝 울었던 거 같기도 하다. 나는 무신론자가 되어 있었으므로, 성당을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그때가 마지막으로 귀신을 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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