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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에가는길 Aug 22. 2024

친구와 싸우는 꿈

참았어야 했나, 아니면 더 화를 낼 걸 그랬나

 
 친구 A와 싸우는 꿈을 꿨다. 내가 A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만 있는 단톡방에 내 중고등학생 시절 사진을 몇 장 공유했는데 A가 그걸 자기 SNS에 올려버린 것이 발단이었다. 자기 딴에는 사진이 재밌어서 생각 없이 올린 거지만 그 사진들에는 나뿐만 아니라 A와 모르는 사이인 내 동창들도 나와 있어 내 입장이 난처하고 곤란해졌다. 내가 모르는 A의 친구들이 그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기는 보고 나는 곧바로 A에게 메시지를 보내 불같이 화를 냈다. 네가 이렇게 공개된 곳에 올려버리면 친구들이랑 같이 찍힌 사진을 막 뿌리고 다니는 내가 미친년 되는 거 아니냐, 당장 글 지워라, 하며 과격한 말들을 내뱉었다. 결국 A가 사과하고 글을 내리겠다고 하며 싸움이 일단락되었지만 내 마음은 무척 찝찝했다. 좀 참고 좋게 말할 걸 그랬나 싶은 후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더 심하게 말해서 A가 창피해하고 당황하는 꼴을 봤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싸움이 싱겁게 끝나버리니 A가 나만큼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것 같아서 답답했다.
 


 이번 꿈의 테마는 '대인관계 내 갈등'입니다. 현실의 인물이 직접 등장하기는 했지만 꿈속의 A가 꼭 A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른 모든 친구들이 조금씩 투영된 대상일 수도 있고, 제 무의식이 안전하고 쉬운 대상을 택했을 것을 고려한다면 부모님이나 교수님 같은 권위자를 투영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싸움의 내용이나 꿈에서 느낀 감정으로 보았을 때 친밀한 대상 정도로 범위를 좁히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당시의 제 현실을 살펴보면, A와는 가벼운 말다툼까지 포함하더라도 이렇다 할 갈등을 빚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모든 친구 관계가 그러하듯 속으로 화를 참거나 서운함을 삭였던 일들은 몇 번 있었지요.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저는 평소 인간관계에 큰 스트레스가 없기도 하고 설령 아쉬운 마음이 생기더라도 입 밖으로 잘 꺼내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언성을 높이거나 논쟁을 해야 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을 꾸었다는 것은 제 무의식만큼은 주변인들과의 갈등을 의식하고 상상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꿈속 갈등의 양상을 보면 친구가 먼저 저를 화나게 할 만한 잘못을 저지르고, 저는 그것에 대해 참지 않고 화를 냅니다. 이것은 현실의 관계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분 나쁘게 했는데 참았던 일들에 대해 꿈에서라도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보상하고 싶었던 소망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부분은 바로 결말입니다. 사과를 받고 갈등이 마무리되었음에도 기분은 좋아지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불쾌감이 생겨납니다. 아마 제 무의식은 관계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해 갈등을 만들었을 때 그 결과가 그리 좋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는 모양입니다. 내뱉은 말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고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겠지요. 좋게 말할 걸 하고 후회하는 한편 더 심하게 말할 걸 싶기도 했다는 부분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움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엿보입니다.




 제가 현실에서 굳이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무의식이 이런 복잡한 고민들을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갈등은 최대한 피할수록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갈등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까요? 그 갈등의 양상은 어떠해야 좋을까요? 최대한 좋게 좋게 이야기하는 게 나을까요? 너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진 말고 은근슬쩍 돌려 말하는 정도로 넘어가야 할까요? 아니면 실컷 화를 내버려야 할까요?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모든 갈등을 완벽하게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해관계의 충돌이나 부정적 감정들은 관계의 필연적 부산물이며 결국 우리는 언젠가 누군가와는 부딪쳐야만 합니다. 이때 어떻게, 얼마나 부딪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는 대인관계 갈등 관리에 대한 연구들이 어느 정도 답을 제공할 수 있을 듯 보입니다.


 관련 연구들에서는 관계에서 갈등이 발생했을 때 개인이 이에 반응하고 대처하는 방식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는데, 대표적으로 Kilmann & Thomas (1975)는 강요형(competing), 문제해결형(collaborating), 타협형(compromising), 회피형(avoiding), 양보형(accomodating)의 다섯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타인수용성'과 '자기주장성'이라는 두 차원에 기초해 이루어집니다. 개인이 갈등 상황에서 어느 정도로 타인을 수용하고 자기주장을 하는지에 따라 다섯 가지 중 하나의 유형으로 분류되는 것이지요.


 각각의 유형은 장단점이 있고 저마다 필요한 상황들이 있습니다. 다만 삶의 중요한 여러 요소들을 전반적으로 고려했을 때 가장 효과적인 갈등 관리 유형은 문제해결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해결형협력형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타인수용과 자기주장이 모두 높은 것이 핵심입니다. 즉 양측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당면한 문제와 이해관계, 각자의 이익과 욕구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여 통합적인 대안을 도출해 내는 방식입니다. 이 유형에서는 자유로운 토론과 개방적인 태도가 중시됩니다.




 과거에는 갈등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간주하고 되도록 피하는 것을 미덕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관점에서 갈등은 무조건 나쁘고 파괴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잘 관리된다면 관계를 환기시키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며 개인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하는 등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갈등을 빚지 않으려고 참고 숨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떤 갈등을 언제 어떻게 빚을 것인지, 그 관리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문제해결형 갈등 관리는 의사소통에 대한 만족감을 높이고 갈등을 점차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효과적인 갈등 관리 유형으로 꼽힙니다. 이는 갈등이 발생했거나 발생하려고 할 때 상대방이 온전히 나에게 맞추도록 강요하거나, 너무 빨리 혹은 간단하게 갈등을 마무리하려고 하거나, 갈등 자체를 피하거나, 내 바람이나 이익을 포기하고 상대에게만 맞추려고 하는 방식은 상대적으로 덜 효과적이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즉 싸울 때는 충분하게, 능동적으로, 열린 태도로, 당사자 모두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문제해결형 갈등 관리를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동양 문화권에서는 서구권에 비해 문제해결형의 비율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릴 때부터 싸우는 것은 나쁘다고만 배웠지 싸울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 배운 적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거나 이익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건방지고 이기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교육과 사회적 인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다루어야 할 갈등들조차 안 보이는 척 넘겨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의식적 불만으로 남아 꿈에서 폭발되었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지요.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현실에서 싸워 본 경험이 많지 않은 저로서는 꿈에서라고 현명하게 잘 싸울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앞으로는 좀 더 건전하고 생산적인 갈등을 빚기 위해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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