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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에가는길 Sep 05. 2024

불합리한 집단으로부터 이탈하는 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지만

 여러 대학교의 학생들이 한 데 모여 인턴십이나 서포터즈 같은 활동을 하는 꿈을 꿨다. 구체적으로 무슨 활동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격한 내부 규율, 그리고 중대한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는 것은 기억난다. 꽤 오랫동안 합숙을 해야 했고 나는 학생 대표 격의 위치에 있었다. 나는 시키는 일을 잘하고 능력을 잘 발휘해서 그 안에서 엘리트 취급을 받았고 감독관도 은근히 나를 총애했다.

 목표를 위한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어느 날 밤 감독관은 우리를 다 모아놓고 모두가 수행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미션이 있다고 했다. 미션이 적힌 종이를 펼치자 그 안에는 충격적인 두 가지 미션이 적혀 있었다. 하나는 '개 죽이기'였고, 다른 하나는 '개의 죽음을 지켜보기'였다. 우리는 그 밤 동안 전원이 개를 한 마리씩 죽여야 했고 서로가 개를 죽이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것이다.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안 한다고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목표를 위해 그동안 다 같이 열심히 달려왔는데 달성을 코앞에 두고 때려치울 수는 없었다. 규율이 워낙 엄격하기 때문에 반항하기가 무섭기도 했다. 감독관은 누가 첫 번째로 할 거냐면서 우리를 독촉했다. 쉽게 지원자가 나오지 않자 곧 별 일 아니라고, 어차피 할 거 빨리 해치우는 게 나을 거라고 회유했다. 첫 주자가 나왔다. 그는 모두가 웅성대는 가운데 개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개가 죽을 때 다들 소리 지르고 경악했지만 누군가가 해내는 것을 보자 용기를 얻었다고 해야 하나, 이성이 마비되었다고 해야 하나, 하나둘씩 나서서 미션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요령 있게 단번에 처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개랑 사투를 벌이며 애를 먹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점차 강해졌다.

 개들이 죽어나가는 수라장에서 나는 내적 갈등을 거듭한 끝에 감독관을 찾아갔다. 분위기를 깨거나 물의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귓속말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저 이번 일 못 하겠고 그냥 나가겠습니다". 그러자 감독관은 눈빛이 싹 바뀌어서는 내 어깨를 꽉 붙들고 안 된다고 했다. 그가 무섭게 몰아붙였지만 나는 계속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는 애절하게 호소해 왔다.

 그는 단체가 우리 학생들을 위해 얼마나 헌신해 왔는지, 단체의 목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이 안에서 내가 얼마나 잘해오고 있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래도 나는 떨치고 도망쳤다. 개를 한 마리씩 죽인 나의 옛 친구들은 하나의 군단처럼 오와 열을 맞춰 서서 다음 미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달리는 동안 나는 조금 후련했고 무척 우울했다.

 그 단체는 대외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곳이었다. 뛰어난 학생들만 모인 그곳에서 나는 꽤 잘 해내고 있었고 활동이 마무리되고 나면 좋은 스펙이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것을 몽땅 잃어버린 것 같았고 다른 학생들이 부러웠다. 좋은 기회를 차버리고 낙오자가 되었다는 걸 주위에 알릴 엄두도 안 났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감독관이었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받으면 뭐라고 하지? 만약 돌아오라고 한다면? 한참을 고민하다 불현듯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다 꿈이니까. 나는 전화를 끊고 잠에서 깨어났다.


  저는 개를 죽여야 하거나 죽이게 되는 꿈을 종종 꿉니다. 주로 도덕성, 양심에 대한 딜레마가 테마인 꿈들입니다. 제 꿈에서 개는 무고하고 연약한 존재의 상징이며 개를 죽인다는 것은 매우 부도덕한 일입니다. 이 꿈에서도 그랬습니다. 모든 학생이 개를 한 마리씩 죽여야 하는 미션을 받았다는 것은 저를 포함한 구성원 모두가 도덕성을 극단적으로 저버려야 하는 시험의 순간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개를 죽이라고 종용하는 집단이 있다면 필시 미친 집단일 것입니다. 당연히 거부하고 그곳을 떠나 경찰에 신고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 과정이 꿈속의 저에겐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빠져나왔고, 나온 후에도 우울해하고 후회하다가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런 나쁜 집단에서 빠져나오는 것에도 고통이 따르리라는 걸 제 무의식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현실에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납니다. 개인에게 소속되어 있던 집단을 빠져나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이비 종교의 일원들은 그 안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왜 많은 직장인들은 착취당하면서도 직장을 옮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조직적인 범죄가 발생할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고려할 만한 것은 사회적 정체성(Social identity)입니다. 사회적 정체성 이론은 우리의 정체성에 사회적인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한 명의 독립된 사람으로서뿐만 아니라 어떤 집단이나 관계에 소속된 일원으로서의 자신도 지각합니다.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애정이 강해지면 집단의 규율이나 가치가 내 것인 듯 내면화되기도 합니다. 그로써 집단과 자신을 분리하기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집단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내 정체성의 일부를 잃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다음은 사회적 압력(Social Pressure)입니다. 개인의 모든 습관, 판단, 선택, 신념에는 사회의 영향이 개입합니다. 제 꿈속에서 감독관은 억지로 학생들이 개를 죽이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원'하라고 했지요. 그러니 개를 죽인 학생들은 그것이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자발적 행동이었다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엄격한 내부 규율과 강한 집단의식, 서로에 대한 감시 등 큰 사회적 압력을 받고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이탈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강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집단 이탈은 개인에게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집단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나, 집단이 내게 보복할 가능성, 집단 내에서 쌓아왔던 관계들이 두절되는 것, 주변 환경이 급격히 변화한다는 것, 앞으로 언제 어디에 다시 소속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과 같은 이탈의 부산물들은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는 사람이 상충하는 두 가지 이상의 믿음, 생각, 감정 등을 갖고 있는 불균형 상태를 말합니다. 기존에 갖고 있던 굳건한 믿음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정보를 접했을 때 등에 흔히 발생하며, 긴장과 불편감을 유발합니다. 꿈속에서 저는 그 집단이 아주 좋은 곳이라고 믿었고 그곳에서의 활동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개를 죽이라는 불합리한 임무를 받게 되면 저는 이 집단이 사실 해롭고 부도덕한 집단이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일원으로서도 존재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는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소속된 집단이 폐쇄적일수록, 좋다고 여겨지는 곳일수록, 우리에게 많은 이익을 제공할수록 영향력은 커집니다. 그래서 그 집단이 불합리하거나 부도덕한 결정을 하고 우리에게 해가 된다고 해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성공적인 에너지 기업이 희대의 분식회계 사건을 일으켰던 엔론(Enron) 스캔들, 차량 부품 결함에 대한 기업 내 은폐가 160만 대에 이르는 대규모 리콜로 이어졌던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리콜 사건은 기업의 부도덕한 결정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게 된 사례들입니다. 이 사례들에서 일부 구성원들은 조직 내에서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집단에 동화되었고 침묵했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반대 사례도 많습니다. 구성원이 아니라면 알 수 없었을, 집단 내에서 썩어가던 많은 문제들은 내부고발자들에 의해 밝혀집니다. 상기한 엔론의 분식회계는 엔론의 전 부사장 셰런 왓킨스를 비롯한 내부고발자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럼으로써 더 많은 피해를 막을 수 있었지요. 유감스럽게도 당시 내부고발자에 대한 보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왓킨스는 고발자로 낙인찍혔고 경력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몸담고 있던 집단을 거부하고 그곳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정신적인 고통과 현실적인 위험을 수반합니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불합리한 조직에 계속해서 남아있는 것은 우리에게 평화와 행복을 보장할까요? 우리는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의문과 양심의 가책을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 있을까요? 집단의 불합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용기 내어 거부할 때 우리는 괴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마침내 불쾌한 꿈에서 깨어나 명료한 진실과 양심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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