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저들과 섞일 수 없어."
저주와도 같은 이 말이 내게는 왜 그렇게 달콤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참 이상하지. 그 어둠 속에 발을 담그고 비로소 안심이 되는 걸 보면 말이야.
날이 너무 좋아서 그런가, 이 언덕은 꼭 비어있는 도화지 같다. 볕은 지나치게 다정하고, 바람에 실려 오는 저 아래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꼭 고장 난 라디오에서 나오는 잡음 같다. 나는 너의 뒷모습이 공기를 가르며 만들어내는 그 작은 흔들림마저 놓치고 싶지 않아 내내 너를 눈에 담았다.
가끔 네 걸음이 너무 가벼워 보일 때면 덜컥 겁이 난다.
저만치 앞서 걷다 문득 뒤를 돌아 저 밑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너. 그럴 때마다 네 눈동자가 조금씩 투명해지는 기분이야. 마치 언제든 저 소란스러운 풍경 속으로 녹아들 준비가 된 사람처럼.
불안은 순식간에 목 끝까지 차올랐다.
여기까지 함께 도망쳐온 주제에, 서로를 증명하는 유일한 목격자가 되어놓고. 이제 와서 너만 저 그럴듯한 숫자들 사이로 돌아가 버리면. 우리가 약속한 무한함이 영영 사라진다면. 나는 어떡해.
억눌렀던 목소리는 도화지 위로 얼룩처럼 번졌다.
우리가 결코 저들 중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구원 같았던 그 사실이 너에게도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