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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율 May 27. 2024

코로나 블루, 생존의 블루스

살기 위해서 견뎌낸 치욕이 불꽃처럼 피어났습니다

환멸에게.


안녕. 요즘은 잘 있는지. 살뜰히 챙겨주지 못한 건 미안합니다. 그래도 잘 있을 걸 알아서요. 너무도 건재해서 언제건 고개만 치켜들면 만날 수 있으니까. 눈을 감아도 고이는 것이 있는 것처럼. 바로 오늘처럼.

    몇 년 전이던가요. 나는 어느 날 열다섯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일을 그만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고 나는 일 대신에 뭐라도 해야 했습니다. 슬프고 울고 싶다고 집에 그저 가만히 있는 건 정말로 우울증 같을 테니까요. 물론 나도 언제나 들숨과 날숨에 우울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이건 우울증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항상 움직이니까. 항상 무언가를 하니까.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침전하도록 내버려두지만 않는다면 모든 게 머지않아 다 괜찮아질 테니까. 그래서 열다섯 시간 동안 자전거 안장에 붙어 계속 달리고 달렸습니다. 강변을 따라 바다에 다다르는 단순한 길이었습니다. 목표가 있는 움직임이란 얼마나 쉽던가요. 몸이 부르짖는 고통을 잊을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바다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오 분 남짓. 자전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로 수평선을 멀거니 응시하다가 천천히 핸들을 돌려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되돌아왔습니다. 천근으로 불어난 듯한 두 무릎을 부여잡고 마침내 목표를 눈앞에 두고서야 사실 바다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까진 몰랐던 척 짐짓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그저 나를 더 괴롭히고 싶었던 것뿐이었을 테죠. 나의 현재를 더 힘들고 아프고 처참하게 만들어서 그 이전에 힘들고 아팠던 것은 하등 별 볼 일 없는 일로 격하시키고 폄훼하는 것. 이것이 그때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방패였습니다. 그래. 아무렴 손가락이 돌처럼 굳어지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 발작을 겪는 건 물론 좀 힘들긴 했었지. 하지만 그래봤자 이틀간 서른 시간 자전거를 타는 거에 비하면야 새 발의 피잖아.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 만큼 탈진을 하는 것보다야 몇 분 호흡이 멎을 뿐인 발작이 훨씬 산뜻했지. 그러니까 더 이상 그깟 걸로 징징대지 말라고. 훌훌 털어버리고 나아가면 되는 거야. 일을 새로 구하고 다시 돈도 모으고. 정신만 잘 차리면 앞으로는 다 잘 될 거야. 코로나 같은 건 금방 지나갈 테니까.

     하지만 코로나는 지나가지 않았고 속절없이 몇 달의 시간만이 사라졌습니다. 그 몇 달간 달라진 것은 좀처럼 없었습니다. 밤에 불을 끄고 누워 다음날 아침 일곱 시까지 뜬눈으로 지새우는 나날이 도돌이표처럼 이어지는 지긋지긋한 불면증을 얻게 된 걸 빼면. 그리고 아무리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달려도 더는 내가 처해진 이 현실보다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빼면.


처음 공황발작을 겪은 건 당시에 일하던 주방의 싱크대 아래 새까만 타일바닥에서였습니다. 브레이크 타임은 끝나가고 곧 저녁 손님들이 몰려닥치기 직전인데 사장은 내게 쌍욕을 하며 당장이라도 한 대 칠 태세로 어깨를 들썩였습니다. 그 어깨의 미세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 순간 오직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그나마 주방 안쪽에 두 명의 다른 직원들이 있었습니다. 거기로 가면 얻어맞는 일만은 피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씨발 씨발 하는 그 목소리가 성큼성큼 따라 들어오는데도 아무도 막아세우지 않았고 거리는 점점 좁혀졌습니다. 주방에는 시시티비가 없다는 사실이 그때서야 떠올랐습니다. 한심한 새끼. 저 사장보다 니가 더 한심해. 이 지경이 되도록 너는 대체 뭐를 했지. 병신새끼.

     그리고 헐떡이던 숨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손끝부터 어깨까지의 감각이 뇌에 전달되지 않았고 그럼에도 그것들이 덜덜덜 떨리는 것만이 보였습니다. 고꾸라진 다리 위에서 내 의지와 관계없이 좌우로 요동치는 두 팔이 너무도 무거워서 꼭 시체의 그것같이 느껴졌고 심장은 폭발하려는 듯이 가쁘게 뛰어서 이대로 멈추는 게 차라리 자연스러울 것만 같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 속에서 가장 나이가 많던 직원 한 명이 내 어깨를 붙들고 외치고 있습니다. 숨 쉬어. 진정하고 숨 쉬어. 숨 쉬어. 숨 좀 쉬어 봐.

     마지막까지 말은 못했지만 실은 나도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그날로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사장은 내가 가지고 있던 출입문의 열쇠를 회수하며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몇 달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코로나가 몇 달째 계속되면서 대부분의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은 뒤였습니다. 이제 나오지 말라는 단 한 마디로 다음날이면 그는 없는 사람이 되곤 했습니다. 두 명이 해야 할 몫을 한 명이 했고 일하는 시간은 하루에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으로 늘어났습니다. 손님들이 다 나간 다음에도 뒷정리를 하는 데에만 꼬박 두 시간이 모자를 만큼 돌아가는 상황은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불평을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때에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니까. 그만두면 달리 갈 곳은 더더욱 없으니까. 기존보다 오십만 원이 삭감된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고 며칠이 지난 후에야 변동된 급여의 숫자로 재작성된 근로계약서를 내밀면서 사장은 꽤 신기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나 요즘 빚 엄청 늘었어. 내가 니들 월급 주느라 신용불량자 되면 니들이 책임질 거야. 아니잖아.

     그 대담이 있고서부터 세 명이 해야 할 설거지를 날마다 혼자서 하게 되었습니다. 니들이 책임질 거야. 책임질 거야. 땀으로 범벅이 된 마스크에 눈물이 흡수되는 동안 그 말만이 숱검댕으로 넘실대는 싱크대와 내 사이를 끝도 없이 맴도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대체 왜. 내 인생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데 내가 왜 내 월급을 주는 사장의 인생까지 책임져야 하지. 단 한 명도 나를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데. 내 열 손가락의 손톱은 하나같이 이미 절반 가량이 갈려나가고 없었습니다. 녹아버렸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까요. 아무래도 사람의 손톱이란 게 너무 약한 모양이었습니다. 아니면 설거지에 쓰는 세제가 너무 독했을지도요. 아무려나 별 의미는 없겠지요. 손톱이 죄다 닳아 없어진들 내가 날마다 닦아야 하는 시커멓게 그을임 낀 숱통들의 개수가 변하지는 않을 테니까. 불변하는 건 고작 그런 것들밖엔 없으니까.

     내가 부모가 없다는 건 사장과 직원들 모두가 알았습니다. 정확히는 개를 걷어차는 아버지와 사이비종교에 영혼을 바친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자 법적으로 성년이 된 이후로 쭉 혼자 살아왔고 따라서 앞으로도 그들을 볼 일은 영원히 없는 것이었지만 이를 한 사람씩 붙잡고서 구구절절 늘어놓는 건 상당히 비효율적이었기에 그저 그들이 없다고만 하는 게 최선이었지요.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좋은 먹잇감의 조건에 부합하는지를 알기엔 나는 많이 어렸고 어리석었습니다. 그리고 도처에서 먹잇감을 찾지 못해 안달하는 괴물들은 사실 언제나 곁에 있었습니다. 그 빌어먹을 역병은 어쩌면 그것들의 봉인을 해제하는 아주 작은 계기에 불과했는지도 모릅니다. 사회에 안정된 보호막이 결여되었을 경우에 안전을 위한 최후의 보루는 결국엔 가족인 것이 자명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겐 바로 그것이 없었고 고립은 그만큼 격렬해졌습니다. 나는 어쨌거나 노예가 되기 가장 쉬운 인간이었습니다. 열아홉 살이 되기 전에는 부모에 의해서. 열아홉 살이 넘어서는 부모가 없음에 의해서. 단지 그런 원리였습니다.

     열두 시간이면 하루의 절반입니다. 그 시간들을 날마다 손톱을 반토막 내는 데에 쓰면서 오며 가며 얼굴을 익힌 손님들에게는 이 집 사장의 딸이거나 동생이 아니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가족이 아닌 한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는 없다는 말에 그저 수십 번 옅은 미소로만 응수했습니다. 내 가족이 없어서 그렇다고는 누구에게라도 차마 선언할 수 없었습니다. 설령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요. 어쩌면 나는 정말로 헌신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도 같습니다. 돈도 인정도 심지어 내 건강조차도 안중에 없이 나는 그저 무언가에 헌신하고만 싶었던 게 아닐까. 내가 이기적인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도 솔직히 자주 들었습니다. 내가 이토록 절실하게 일과 일터에 매달리는 것은 오직 나를 위해서이기 때문에. 삭감을 밥 먹듯 하는 그깟 월급 때문도 아니고 수고했다라는 다른 이들의 입에 발린 격려 때문도 아니고 그저 내가 그렇게 헌신하고자 하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므로. 그리고 그럼으로써 내가 바랐던 것은 그저 사람으로서 숨을 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헌신과 그를 향한 노력이 오히려 나 자신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끔 만드는 매개체였다는 것을 공황발작이 일어나기 그 직전의 순간까지도 진심으로 몰랐다고 한다면 나는 얼마나 우스워질까요. 그러나 그게 바로 나였습니다. 그리고 내 몸은 내가 이기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내게 깨우쳐주기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했습니다. 그렇게 내 헌신은 이내 방향성을 잃었습니다.

     정말로 재밌는 것은 이것이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잔인한 사장과 가장 힘든 일터조차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틀간 서른 시간 내내 자전거를 타거나 몇 달간 하루에 단 한 시간도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혹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쯤으로 퉁칠 수 있는 수준의 해프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지 해프닝입니다. 조금의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저 하하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만한. 단지 그뿐인.

     하지만 어쩐 일인지 코로나는 조금의 세월에서 멈추지 않았고 그나마 확진자 수가 적은 지역으로 집까지 옮겨가며 구한 새로운 일터에서 또 몇 번의 계절이 흘러 마침내 나의 공황발작은 이상이 아닌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턴 더는 자전거도 불면의 밤도 수백 키로의 이주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고. 이제는 정말 그 어떤 의미도 의미가 없다는 걸 받아들인 다음에야.

     나는 비로소 우울증 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정형외과의 진료차트에 적힌 내 나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만 이십삼 세. 다행히도 숱통을 닦을 때 쓰는 세제와 결별한 뒤부터 손톱은 천천히 아물어서 어느덧 둥그런 모양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 혹사되고 나면 다시는 복구될 수 없는 것도 있더군요. 의사는 내 오른쪽 어깨의 초음파 사진을 화면에 띄웠습니다.

     마모가 굉장히 심각합니다. 연골 여기 보이시죠. 지금 환자분이 아직 이십 대 초반이신데. 한 사십 대 남성의 마모도라고 보시면 되거든요.

     굳이 남성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블루칼라 노동자를 뜻하는 말로 추정됐습니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싶었겠지요. 그러는 의사 본인도 사십 대 남성이었지만 분명 내 어깨보다 더 말끔한 상태를 유지 중일 게 분명했으니까요. 물론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메스를 잡을 땐 어깨를 쓰기도 하겠지만 하루에도 수십 장의 불판을 닦고 수백 개의 그릇과 음료수병을 테이블에 나르고 치우는 일을 반복해 본 적은 결단코 없을 테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의사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뭐라고요.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도수치료를 받으러 오라고요. 네네. 건강보험은 안 되고요. 어련하겠어요. 다신 보지 맙시다 우리.

     대체 의사는 내 어깨가 이 지경이 된 이유에 대해서 일말의 추론이라도 하긴 해본 걸까. 말마따나 사십 대 남성만큼 연골이 마모될 정도로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조차 없는 이십 대 애새끼가 그 어마어마한 도수치료 비용을 감당할 수가 있으리라고 진짜로 믿는 건지. 아니면 그런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의사인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암담하기로는 정신과 의사 쪽도 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콕 집어서 마모도가 어떻습니다 하는 식으로 말할 수 없는 정신과의 특성 탓인지는 몰라도 좀 더 환자를 신중히 관찰하려고 시도는 해보는 듯한 것만큼은 그나마 높게 사줄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다만 십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상담이 마무리될 때마다 선심 쓰듯 덧붙이던 그 말은 도무지 들을 때마다 열이 뻗히곤 했습니다.

     날마다 삼십 분이라도 산책 삼아 걸어보세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거의 모든 환자들에게 이미 수백 번은 읊었을 이 대사를 나에게도 그대로 읊어대는 의사의 얼굴에는 그 특유의 전문가다운 솔루션을 제공하는 자의 선민의식에 기반한 기만 같은 것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기에 나는 번번이 저 능글맞은 얼굴 밑으로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상당한 공을 들여야 했습니다. 나는 그 무렵 이미 날마다 두 시간씩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끌고 나가기가 여의치 않을 때 걷기를 선택하는 것은 공황발작을 앓기 훨씬 전부터 이어져온 나의 오랜 습관이었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날은 더 많이 걷고 일을 하는 날은 그보다 적게 걷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평균치로만 따져도 두 시간이었으니 적어도 의사가 말한 삼십 분보다 더 극렬한 처방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의사가 진짜로 그걸 처방의 일환이라고 믿은 것이라면. 어쨌거나 의사는 결국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라는 말을 그렇게 돌려 말한 것이었겠죠. 맙소사. 내가 몇 년 전에 했던 망상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침전하도록 내버려두지만 않는다면 모든 게 머지않아 다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그게 진실이 아님을 입증한 것도 이미 몇 년 전이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똑같은 조언을 하는 의사의 처방에 정말로 따를 셈이냐. 바보가 아니고서야.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바보였습니다. 병신이고 우스운 사람이고 천애고아인 애새끼였습니다. 나는 그 뒤로도 삼십 분씩 걸으라는 그 말을 빼곤 의사의 처방을 착실히 따랐습니다. 우울증을 완화시킨다는 약들을 아침과 저녁마다 삼켰고 그 약들이 나에게 도움을 줄 거라는 장광설에 대체로 수긍했습니다. 물론 완전히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옛날부터 나는 약에 대한 것에만큼은 의심하기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따랐던 것입니다. 그건 내게 차라리 겸손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역대급 호황을 맞아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신경 쓸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든 불쌍한 의사를 탓하지도 않고. 그 모든 만악의 원흉으로 지목받고 있지만 실은 그저 그동안 어둠 속에 숨어있던 것들을 끄집어냈을 뿐인 가엾은 역병의 탓을 하지도 않고. 그리고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절반쯤 죽인 그 사람 미치게 하는 공황발작의 탓 역시 절대로 하지 않고서.

     그저 약을 꿀꺽 삼켰습니다. 나는 한 치의 의심의 여지도 없는 완벽한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그것도 코로나 블루 시대의 우울증 환자. 그래봤자 한 백만 명 중에 한 명에 불과한.


공황발작이 가장 극심하게 나를 괴롭히던 시기에 요즘 부쩍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말을 정말로 자주 들었습니다. 나처럼 사회의 안전망도 최후의 보루도 없었던 사람들. 혹은 그것이 있었음에도 내가 약을 삼키며 그렇게 느꼈듯이 그것이 생각만큼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믿었을 사람들. 어쩌면 가장 전방에서 그 누구보다도 악착같이 분투했음에도 더 열심히 살지 못해서 우울증이나 걸렸다는 비난을 받으며 소리 없이 흐느꼈을 사람들. 그 누구도 앞서서 겪어보지 못했던 시대에 그럼에도 부푼 희망을 품었다가 그 대가로 더 크게 꺾여지고 부러진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피울음을 다 소화시키고도 남을 팬더믹이라는 서글픈 변명. 이 혼돈의 한가운데에서조차 슬그머니 웃고 실없이 깔깔대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나는 용서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과는 다른 이유로. 혹은 다른 이유일 거라고 부던히도 믿으며.

     자살이라는 행위 그 자체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살하는 사람에 자신을 빗대가며 그 죽음마저도 스스로의 우월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발판처럼 활용하지 못해 안달하는 인간들을 보면 문자 그대로의 비참함이 엄습하곤 합니다. 나도 힘들었지만 나는 극복했어. 그런 한입거리도 안 되는 몽매한 웅변 따위는 누구라도 쉽게 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살자들이 지금 살아있는 우리보다 더 부도덕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들은 오히려 부도덕한 것을 너무나도 경계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자살로 내몰리게 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누구도 그것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천한 잣대로 그들의 목숨까지 재단할 권리를 스스로 주장할 만큼 한 점 오욕도 없이 살아온 자는 적어도 내가 아는 세상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자들은 매사 크게 웃고 마음 깊은 곳에 양심이라는 불씨를 꺼뜨리지 않은 사람들은 조용히 눈물 흘리는 세상이라는 것이 나를 지나치게 슬프게 합니다. 비약을 눈감아 주신다면 감히 비애라고도 말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쉬고 싶을 때에 자살을 가장 하고 싶었습니다. 열아홉 살이 되기 전에는 어떻게든 혼자 살 수만 있다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십 대의 첫 줄을 쓰면서는 실제로 그렇게 된 것만 같아 잠시 행복에 겨워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짧은 단꿈을 진흙탕으로 휘저으며 팬더믹이 왔고 사람들이 더 쉽게 악해졌고 그 속에서 나는 다시 미아가 되어 단지 그들처럼 악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끝없이 발버둥을 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늘 외로움보다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간절함이 더 컸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나를 내 과거에 빗대가며 스스로를 다그쳤습니다. 열아홉 살이 되기 전을 벌써 잊은 거야. 그거야말로 진짜 지옥이었잖아.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야. 알잖아. 고작 이거에 징징대려고 그런 지옥을 견디며 살아남은 게 아니라고.

     그래. 하지만 그때는 열아홉 살을 넘긴다는 목표 이외에는 딱히 희망이라는 것을 몰랐고. 지금은 이미 그걸 알아버렸어. 그리고 희망을 모르는 채로 사는 것과 알게 된 희망을 빼앗긴 채로 사는 건 너무도 달라. 하지만 희망을 모르는 채로 죽는 것과 알게 된 희망을 빼앗긴 채로 죽는 건 놀라울 만큼 서로 동일하겠지. 죽음이란 그런 거니까.

     내가 알던 죽음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희망에도 지옥에도 나를 빗대지 않아도 되는 것. 그저 푹 쉴 수 있는 것. 따뜻한 바람에 일렁이듯 깜빡 잠이 드는 한낮의 몽마처럼. 더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계획하고 판가름하고 생각하지도 않은 채로 그저 공허하게. 기나긴 쉼의 시간을 더는 빼앗기지 않는 것.

     그리고 만일 그보다 삶이 더 나은 것이라면 나는 어느 지점에서 그걸 찾아야 하는 것인지. 실은 나는 아직도 해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나이답지 않게 노쇠하게 굳어가는 몸과 마음을 이끌고서 아직도 이렇듯 목숨을 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더 닮았는지 나는 알고 싶습니다. 내가 꿈에도 그렸던 행복이라는 것의 현신인지. 아니면 꿈이 아닌 기억의 무수한 파편 그 전부를 할애해 온 생애에 걸쳐 찾아 헤맸던 환멸. 바로 당신인지를.


사족.


아래의 시는 스물한 살의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희망의 징표입니다.


세상이 고아를 내치어서

나는 고아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세상이 고아와는 말을 섞을 일이 없는 듯이 굴어서

나는 고아의 언어만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세상이 고아의 하는 짓은 한사코 피하려고만 해서

나는 고아의 몸으로다가 그림자를 지어 둘러입고 다녔습니다


굶주린 언 발꿈치로 고아의 언어를 쓰며 고아의 몸을 놀리며 고아의 그림자를 씌우고 고아의 짓거리로 노니는 나는 영구히 지평을 찾아 헤매는 외눈박이 늑대가 되었습니다


늑대는 오늘 밤 머리 뉘일 여우굴을 아직꺼정 만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매서운 바닷바람은 일순 늑대 꼬리에 들러붙은 사막의 황혼인 것입니다


늑대가 삼킨 뒷발.

온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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