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의 편지] 이야기 열하나
어제는 약을 아무리 삼키려고 해도 삼켜지지 않았어. 물을 몇 번이나 들이키고 또 들이켜도 목구멍에 걸린 알약은 도무지 넘어가지를 않았어. 나는 나 스스로를 질식시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도 약을 삼키려는 시도를 멈출 수 없었어. 아. 너무 지옥 같았어. 지독하게도 현실 같아서 더더욱.
그런 꿈을 꿨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건 정말 꿈이었을까.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은 밤마다 꾸는 꿈과 실제의 경계가 무너지면서부터 증폭되는 것 같아. 원심력을 이용하는 아주 간단한 장치의 원리와도 같아. 한 번 한쪽으로 소용돌이가 몰리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어지는 거지. 그런 장치가 내 머리에 심어져버렸어. 아니라면 내 마음 속에거나. 하지만 어딘들 뭐가 달라지겠어. 어차피 파멸이 가까워진다는 건 바꿀 수 없는데. 그런 슬픈 징조들이 내 삶에는 더 자주 나타나고 더 맹렬하게 반사된다. 마치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밖엔 없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나도 잘 알아. 하지만 그래도. 죽음이 삶의 외줄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것조차도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정말로 죽고 싶은 걸까.
정말로 죽으면 내가 사랑하는 시인의 영혼에 닿을 수 있을까.
삼 년 전 여름으로부터.
스러지려는 노년도 막 새순이 돋아나는 어린 것을 곁에 둔다면 덜 적막하지 않을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줄기는 다 죽지는 않은 것 같다. 이파리는 비쩍 말라서 되살아날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도 열매는 기필코 끝맺겠다는 듯이 동강 잘린 뿌리 끝으로도 물을 끊임없이 끌어올리는 것 같아. 어차피 겨울이면 모두 흙으로 돌아갈 몸인데도 왜 저렇게까지 안간힘을 쓰는 걸까. 목숨을 건다고 해서 모든 목숨이 삶을 굳힐 수 있는 건 아닌데.
이미 늙은 방울토마토는 설마 그것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악바리를 쓰며 온갖것을 바들거리며 마지막 희망을 짓이겨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너희들만이 아니라는 걸 우리에게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런 행적에의 경외심의 분출로써 이들이 거느릴 수 있는 것이 지렁이의 외로움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지렁이는 자신이 그토로 연민해 마지않은 가느다란 뿌리를 위해서 오늘도 최후의 사투를 벌인다. 자신이 아닌 꽃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열매를 위해서.
삼 년 전 여름으로부터.
하지만 말이야. 그 시작점을 밟고 올라선다는 것이 또다시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일이면 어떡해야 하지. 또다시 그때처럼 부끄러운 일일 뿐이라며 웃어넘겨야 할까.
혼란스럽다. 되풀이되는 뫼비우스의 정거장에서 오직 시간만이 쫓을 수 있는 발자국을 남기는 경주마가 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정말로 헷갈리려고 해. 이럴 바에야 차라리 도축장에 하루라도 먼저 끌려가는 것이 모두의 상처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아닐지.
이젠 알지 못하겠다.
삼 년 전 여름으로부터.
추신.
질리지도 않는지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작디 작은 부분에서 이게 보기보다 더 무너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지. 이를테면 웃옷 주머니에 담배갑을 넣은 채로 세탁기를 돌려버린 걸 빨래가 다 끝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던가. 분명히 아까 집에 들어오면서 우편함에서 꺼내 들고 온 수돗세 고지서를 당최 어디 선반에 올려놓았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다던가. 며칠 전에 땅에 떨어진 단풍잎을 주워다가 책 사이에 끼워둔 것까지는 당장 그려낼 수도 있을 만큼 선연히도 떠오르는데 대관절 그게 어떤 책이었으며 어디에 뒀기에 보이지 않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어서 온 사방의 책장을 다 뒤지다가 불현듯 엉망이 된 방바닥을 발견하게 된다던가. 그런 가까운 일들부터 망각에 침범당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잊어버리게 된 그것들 이상으로 사람의 피를 말리는 것이다.
기왕에 망각이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면 좀 잊으려고 했던 것들부터 잊게 만들어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머릿속에서 이십 년도 더 묵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는 지금도 그 자리에 서있기라도 하듯 손쉽게 되살려내면서도 불과 며칠 전 전화 너머로 들었던 친구의 목소리는 벌써 가물가물 흐려져만 가고. 그렇다고 해서 별로 다시 전화를 걸고 싶지도 않다. 그 누구의 목소리도 그다지 듣고 싶지 않다. 그저 머리가 살짝 아프고. 눈가와 뺨에 조금 열이 올라서. 별로 잊을 것도 없게끔 선뜻 선잠에 들어 꿈이나 꾸고 싶다.
하지만 단꿈을 꾸고 싶다는 열망이 간절할수록 그 잠은 필히 악몽에 시달리게 되곤 하지. 내가 지금까지 꿨던 꿈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푸른 물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 나 혼자 떠있는 꿈이었다. 그러나 무섭다거나 빨리 벗어나야 할 것 같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바다와 나. 그제 전부였다. 그 바다의 꿈을 한 번만이라도 더 꿔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생각해보면 이 자체가 악몽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또 잊고 싶었던 것들에 시달릴까 봐 두려워서 편히 잠에 들지도 못하고. 겨울이라서인지 눈이 너무 뻑뻑하다고 투덜대면서도 눈을 제대로 감고 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습도가 높아지면 등허리가 아프고. 이렇듯 몸이 낡아서 걸핏하면 잘 앓고. 그러면서도 날이 너무 추운 걸 핑계로 술을 마시고. 뜨거운 물에 타 마시면 술이 아니라 감기약이라는 합리화로 위안을 삼고. 이 지난한 것들을 지겨워하면서도 이제는 지나치게 괴로워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다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버리는 것만이 새삼 놀라울 뿐인. 이 삶 자체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빨리 나이를 먹어버리고 싶기는 했었다. 그 누구도 감히 어린 놈의 새끼라는 이유로 나를 짓밟을 수 없도록. 하지만 단순히 나이가 든다고 해서 짓밟히지 않게 되는 건 아니지. 그저 이유가 달라질 뿐. 단지 하루하루 삶이 계속되었을 뿐인데도 향후 망각에 삼켜지기를 바라게 될 장면들은 어느새 켜켜이 포개져만 가고. 그 잔해 밑에서 파헤치다가 매몰되다가를 반복하며 차츰 위험한 상황을 감지하는 후각이 발달하게 되고. 그럼에도 그것을 어떻게 피할지에 대한 답은 좀처럼 명확하게 내릴 수가 없어서 수십 번 머리를 싸매다가. 그러면 내가 그때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그걸 조금이나마 더 완곡하게 넘어갈 수 있었을지를 수백 번도 넘게 되짚으며 나 자신을 닦달하다가. 정말이지 이렇게 사는 걸 어른이 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치졸한 일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다시금 매몰되고야 만다.
아. 그래서 도연명이 귀거래사를 쓴 것은 언제였더라. 나도 이제 그만 돌아갈 준비를 하고 싶은데. 내가 그 나이가 되려면 아직도 십 년도 넘게 남았군. 젠장. 참 지치지도 않게 질리는 삶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어쨌거나 항상 같은 말을 하려고 한다. 언젠가의 지나간 계절에 나는 이렇게 썼던 것도 같다. 맞는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항상 같은 말을 하며 살아가고 사람은 어차피 바뀌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말은 설령 아무런 목적이 없더라도 늘 반쯤은 거짓말이고 진실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의지만 앞선 억지라는 것이다. 백여 년 전 폴 디랙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론물리학자는 서른이 넘은 물리학자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여든둘에 죽었다. 그래. 누군가가 누린 장수라는 행운에 진실하지 못하다라던가 반쯤은 거짓말쟁이라던가 하는 꼬리표를 붙이는 악취미는 그다지 없다. 그가 그런 말을 하지만 않았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여생에는 망각이라는 축복이 내려졌던 것 같다. 자신 스스로가 서른을 넘기고 난 뒤에도 그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 여생도 그는 물리학자로 살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쨌거나 항상 같은 말을 하려고 하는가. 기억이라는 것이 망각으로 인해서 무너지면 그뿐인 모래성에 불과하다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물론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소거할지를 선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로도 모래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빠르게 허물어지고 사람의 피도 꼭 그와 같이 말라간다. 어차피 한낱 바람이 부는 속도로만 움직이다가 사라질 모래먼지일 뿐인 우리가 막아서봤자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로써 폭풍을 불러올 각오라도 되어있지 않은 한은 말이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진실된 말을 한 적이 있던가. 거짓말을 하는 데에는 그리 익숙한 편이 아니라고 확언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짓말의 반댓말이 반드시 진실인 것은 아니니까. 어쩌면 항상 망각하거나 망각되기를 고대하면서 그 비참한 잔상을 현실에 투영하려 애쓰느라 진정으로 전해야 할 말을 놓치면서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지.
평온한 바다는 언제나 폭풍이 지나간 다음에야 찾아온다. 그것을 몰랐다고 하면 조금은 바보 같을 테니 차라리 잊고 있었다고 해두자. 그러면 그것이 다시 돌아올 자리는 남아있는가. 무너져버린 부분을 채울 수는 없을지언정 받쳐줄 수는 있겠는가. 그 일그러진 형태를 다시 마주할 준비는 되었는가.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치졸한 어른은 되고 싶지 않고 아직도 미처 다 도망쳐 나오지 못한 기억들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이 한 가지의 같은 말을 계속해서 해야만 하겠다. 풍파를 지나고 풍파를 지나서도 또 풍파 속에 들어설지라도. 언젠가 보았던 너울은 언제까지나 꿈결의 피상으로만 남을지라도. 설령 그 끝에 다다라서조차 윤슬의 빛깔과 조우할 수 없게 될지라도.
나는 그 무엇도 되지 못하더라도. 그럼에도 사람만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