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의 편지] 이야기 열
하지만 말이야. 원망하고 싸우고 탓하며 살아가는 그 존재들이 또 언젠가는 위로가 되고 갈망이 되고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이정표가 되는 건 어째서일까.
이 비를 머금은 마음의 뿌리처럼 나에게서 도망치지 말아달라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비겁한 사람인 걸까.
여름의 비가 오고 방울토마토들은 빨갛게 익어간다. 그리고 자신을 데려갈 다가올 죽음을 피하지도 않아. 무르익는 파멸을 고스란히 지켜볼 뿐.
가장 절실한 단 한 순간의 결실을 위해서 나머지 모든 순간이 있다는 듯이 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그 순간을 기다리는 일을 멈추지는 않으리란 듯이.
삼 년 전 여름으로부터.
그 무렵의 엘피바는 나에게 그랬다. 고통스러운 퇴근과 집보다도 가까운 네온사인의 불빛. 그리고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담배 연기와 병맥주. 자기만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주는 바텐더와 그런 바텐더에게 괜히 실랑이를 거는 틀에 박힌 단골들.
그리고 떨리는 스크린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얼굴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러나 첫 음만 들어도 누군지 알 그런 사람들.
그 모든 것이 한데 엉켜서 스물두 살의 나를 지나쳤었다. 지금은 아득히 멀어져서 손에 잡히지도 발에 밟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이 죽을 힘을 다해서 관통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내가 잊으려고 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름 자국처럼 그것은 마음의 자물쇠 앞에 그대로 남아있다. 다시 철렁 하고 열릴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리고 잊고 싶은 것과 잊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남에겐 볼품 없더라도 그래서 더 나만이 이끌고 갈 수 있는 내 과거의 발광들. 반짝반짝 빛나는 그 속에 무엇이 모여들 수 있을까.
지켜줘. 이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숨통을 끊는 세상의 끝을.
내가 너무 멀리 떠나기 전에 붙잡아 줘.
삼 년 전 여름으로부터.
추신.
사실은 아무것도 쓰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다.
나는 억지로 쓰려고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굳이 남 얘기를 들먹이지 않고 오직 내 얘기만 하자면 나에게 쓴다는 것은 내 스스로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밖엔 아니다. 아무리 별다를 것 없는 것으로 첫 문장을 쓴다고 해도 결국 내가 쓰는 글에서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미숙하며 생의 그 무엇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부끄러울 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지곤 한다. 설령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나 자신이 그걸 알고 있는 한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글을 쓰는 것은.
나약함을 드러내는 부끄러움보다 나약함을 모르는 부끄러움이 때론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아직도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우연.
나는 아주 약간은 운명론자라서 우연이 겹친 필연이라던가 필연으로부터 떠오르는 인연 같은 것을 대체로 믿는 편이다. 예컨대 나는 글을 쓸 때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 짧은 글 한 편을 마치는 데에도 적게는 서너 시간이 걸리며 어떤 날은 눈 깜짝할 새 예닐곱 시간이 훌쩍 지나있기도 하다. 그만큼 하나의 글을 완성의 범주에 넣어놓고 나면 몹시도 지치게 되는데 그러고서도 그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보고 나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 몇 초만에 모조리 지워버릴 때도 더러 있다. 혹은 앞으로 영원히 열어보지 않을 것이 분명한 파일 카테고리에 쑤셔두고서 그대로 돌아서버리거나. 바로 그런 순간에 내가 찾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 글과 나는 인연이 아닌 것이다. 혹은 세상과 이 글이 인연이 아닌 것이다. 애초에 세상에 나올 인연이 아닌 글이었던 것이다. 라고.
그러므로 지금 쓰는 이 글이 세상과 인연이 될지 어떨지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이왕 쓰기로 하였으니 더 써내려가도록 하겠다. 나는 며칠 전 자주 가는 동네의 한 서점에서 어떤 책 한 권을 손에 집어들게 되었는데 묘하게도 그 책이 상당히 끌렸다. 러시아식 이름을 가진 영화감독이 쓴 책. 책을 사자마자 단 한 챕터를 읽었을 뿐인데도 생각 이상으로 흥미가 동해서 서둘러 그의 이름을 검색창에 쳐봤다. 데뷔작은 이반의 어린 시절. 그리고 대표작은 희생. 아. 그때서야 나는 내 방의 벽면에 붙은 포스터를 들여다본다. 포스터에 쓰인 제목은 희생. 그 아래 쓰인 감독의 이름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나는 이 낡은 집의 벽면 여기저기에 난 못자국들을 가릴 요량으로 몇 개 영화들의 포스터를 붙여놓았었는데 이 희생이란 영화의 포스터는 심지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있던 것이었다. 무려 일 년이 넘도록 알게 모르게 수도 없이 눈에 담았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글씨의 활자. 하지만 오히려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분명하게는 의식하지 못했던. 그것이 일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서점의 그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내 눈에 버젓이 띄었을 때. 그것을 집어든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거스를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의 필연인가.
그리고 그의 영화를 본 극장. 그 포스터를 나눠준 그 극장이 오랜만에 가고 싶어졌고 그 길로 몇 달만에 혼자서 영화를 보러 갔다. 여행과 나날. 올 겨울에 새로 개봉한 영화의 제목이었다. 새로 개봉하는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러시아 영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거스를 수 없는 무언가라고 해도 좋겠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것 역시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다만 그런 이야기다.
영화가 좋은 것은 단순히 영화를 본다는 행위를 넘어서 그 이미지들의 향연 속에서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무의식의 기억들을 건져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꼭 유익한 기억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나에게 심어진 복잡한 심층을 새삼 느끼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일이다.
무의식은 역시 우연의 연속성을 체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컨대 이 영화에도 그런 장면들이 있다. 바닷가의 고요한 풍경을 보여주는데 순간 벌레나 새들이 카메라 앞으로 날아다닌다든지. 아무리 영화라는 것이 극도로 절제된 이미지만을 응축해서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을 촬영하는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모든 자연적인 상황까지 통제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사소한 어그러짐. 화면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수많은 불청객들을 들춰내는 아슬아슬한 시그널들. 말하지 못하는 아기의 옹알이가 이미 숙련된 배우인 어른들의 수십 번 연습했을 안정된 대사들 사이에 불쑥불쑥 끼어든다든지. 그러나 그런 불협화음 가운데 그나마 필연으로 봐도 크게 해가 되지 않을 만한 것들을 선택해서 영화의 한 장면으로써 기능하게끔 편집하는 것이 결국은 감독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영화 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연속성. 꼭 개연성이 없더라도. 혹은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연속성은 언제나 일어난다. 그리고 장면은 이어져서 바다의 화면을 재생한다. 이 바다에서 시신 두 구가 떠오른 적이 있는데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던 어린 아이의 시신은 거의 백골이 된 상태였더라는 화자의 이야기. 문어가 뜯어먹은 것이라고 했다. 화자는 무서운 얘기라고 했고 그를 듣고 있던 영화 속의 다른 인물은 슬픈 얘기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생각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문어. 문어가 사람을 먹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사람을 먹은 그 문어를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잡아서 먹게 되면 그 사람은 식인을 한 것이 되는 것인가. 먼 옛날 조선의 사람들은 문어를 특히나 귀하게 여겨 그 이름에 글월 문 자를 붙여주었다. 글월을 아는 것이 그만큼 귀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귀한 문어를 먹어서 식인을 한 모양새가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우스운가. 무섭다기보다도 슬프기보다도 우스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문어의 눈은 엄밀히 말해서 눈이 아니라 두뇌의 일종이라던데. 문어의 눈은 자신이 본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러한 눈을 가진 문어는 사람보다도 더 귀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애초에 식인을 하는 것보다도 문어를 잡아먹는다는 그 자체가 더 무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 속의 두 인물이 바다로 들어갔다. 그들은 헤엄친다. 한 명이 물 밑에서 물고기를 봤느냐고 묻는다. 그 말을 들은 다른 한 명은 물고기를 찾으러 물 밑으로 들어간다. 그 물고기는 문어였을까. 아니면 눈 옆으로 한 쌍의 아가미가 있는 그저 평범한 물고기였을까.
그들이 헤엄치는 장면을 보며 나는 또 오래도록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이번엔 어릴 적 내 아버지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 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 그러니까 내가 그로부터 이 얘기를 처음 들은 꼭 그 나이만큼 어렸을 적에 몸이 많이 약했다. 내 골격이 여리고 손목과 팔이 유독 가늘고 하얀 것은 모두 아버지를 닮아서였다. 계집애 같은. 이 말은 어렸던 아버지가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동네 형들은 그의 손목을 잡아끌며 연거푸 말했다. 계집애 같은 새끼. 그 계집애 같은 버릇을 고쳐줄게. 그러곤 쌀 한 포대 무게도 채 되지 않는 아버지를 나룻배에 태워 바다 한가운데로 끌고 가서 그대로 물 밑으로 던져버렸다. 남자답게. 너 스스로 살아나와 봐. 살고 싶었던 아이가 겨우 나룻배 근처로 가까이 헤엄쳐 오면 형들은 노를 저어 더 멀리 가버렸다. 또 겨우 헤엄쳐 다가가면 또 멀어지고. 다가가면 또 사라지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딱 죽기 직전까지만 거푸 또 연거푸. 사실 어쩌면 정말로 죽었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엔 워낙 아이들이 많았고 그곳은 작은 섬마을이었고 바다는 언제나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무대였으니까. 바로 그것이 몸이 약한 그 아이를 더욱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 작고 보잘것없는 몸뚱이 하나쯤 바다에 삼켜져도 아무도 그 누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영화 속에서 물고기를 찾으러 물 밑으로 들어간 아이는 다시 돌아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살아남았고 자라서는 유독 가늘고 하얀 손목과 팔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남자의 손목과 팔이 그렇게 하얗고 가는 것을 다른 이에게서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니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계집애로 태어난 것을 끔찍하게 부러워했다. 그것은 죽음의 트라우마로부터 파생된 아주 순수한 질투였다. 계집애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물 밑으로 내던져지는 일 따위는 없을 계집애. 아버지가 내 몸을 빤히 바라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아주 순수하게 나를 부서뜨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나를 제외한 집안의 모든 것을 폭격처럼 부수고서 번번이 그 파편에 찔려 피가 흐르는 나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봤다. 나는 그때의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에 커터칼로 내 발바닥의 살갗을 째서 아무렇게나 박힌 유리조각을 빼내는 데에 퍽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양말을 갈아신고서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다니는 데에도. 그때의 아버지가 형들의 그 멍청하고 졸렬한 고함과 비웃음과 나룻배를 젓는 노의 물살에 익숙해졌듯이. 그것이 나에게는 바다였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복수였을까. 혹은 바꿀 수 없는 필연에 대한 반항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반향이었을까.
만일 내 아버지가 자신의 그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마치 그때의 그 아이로 돌아간듯이 투명한 눈으로 울먹거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버지를 아주 완벽하게 증오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지울 수 없던 본능에 가장 가까운 공포. 그 공포를 내게도 대물림한 것까지를 연민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인과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할 의지도 그럴 가치도 지금의 나에겐 없다. 어차피 삶이란 우연과 우연의 연속성에 불과하니까. 다만 내가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검은 바다에서 단지 살고 싶었던 그 작은 아이만큼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는 것이다. 발을 디디는 매 걸음마다 소리 없이 울던 그때의 내가 그랬듯이.
이윽고 영화는 끝이 난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 속의 영화가 끝이 난다. 검은 바다에서 막을 내린 방금 그 영화는 영화 속의 인물이 쓴 영화였다. 그는 자신이 쓴 극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서 자신은 재능이 없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는다.
그리고 영화는 계속된다.
사실은 이때부터 집중해서 보던 것이 조금 흐트러졌다. 조금 전까지의 장면들에서 단순히 영화가 보여준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재생해대느라 진이 빠진 데다가 영화의 배경이 여름의 바다에서 겨울의 숲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 겨울숲. 물론 낭만이 가득했지만 너무 고요한 나머지 내 오른쪽 귀의 이명이 유독 더 거슬리게 울렸다. 이 또한 감독이 예상할 수 없던 범주의 우연이겠지. 말 없는 고요함을 연출했지만 내 귀에서는 말소리를 대신해서 쟁쟁한 칼소리가 포착되고 있는 것은.
다만 그 어떤 대사나 독백 혹은 공백보다도 더 기억에 남은 것이 있다. 예컨대 눈이 내리는 산장에서 괘종시계가 울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얼핏 시계를 들여다봤을 때. 실제의 시간도 정확히 아홉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영화의 안팎을 교차하는 카타르시스. 동시에 역시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은 저 인물들의 시간과는 다르다는 자각에 묘하게 자극되는 감각. 문득 커지는 엔딩크레딧 이후의 공허에 대한 기대감. 그런 것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무통에 담긴 물고기가 그만 물과 함께 얼어붙어 죽어버린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에서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관객이 소리내어 웃는 것을 들었다. 나는 정말로 거기서 울어버릴 뻔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단지 순수하게 물고기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물고기가 죽었다. 물 밑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아가미를 가지고서도 물고기는 죽어버리고야 말았다. 서글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시끄러운 웃음들이 극장을 가득 메웠고 나는 눈물을 흘릴 기회를 놓쳤다. 나에게는 서글픈 장면이었던 것이 지금 이들에겐 유쾌한 유머 혹은 그러한 장치의 일종일 뿐인 것이다.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머지않아 이 역시도 그저 우연의 범주 안에 드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즉 하필 이날 이 시간에 이 영화를 함께 본 이 사람들 가운데 물고기의 죽음으로터 진짜 죽음의 표상을 떠올릴 사람이 나밖엔 없었다는 우연. 다만 그런 우연이라고.
어쩌면 이건 꼭 우연만은 아닐 텐데. 필연이라기에도 우습고. 안다. 나도 알고 있어. 그러나 어차피 삶의 연속성이란 언젠가 막을 내리니까. 별 상관 없지 않나.
영화가 끝난다. 영화가 진짜 끝난다. 영화 속의 영화가 끝날 때는 올라가지 않았던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어두운 바탕을 수놓는 영화 밖 사람들의 이름들. 그 이름들 위에도 눈이 내렸다. 고요하게.
내가 지금 쓰는 이 글이. 혹은 내가. 세상과 인연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살다가 보면 때론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장면들 속에 놓이게 되기도 한다. 예컨대 최근 나는 내가 예전에 일하던 카페의 단골손님 두 명을 전혀 예기치 못하게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한 명은 어제 아침에 그저 길을 걷다가. 짧은 찰나였지만 시선이 교차했고 서로 알아봤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나도 인사는 나누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단지 그대로 지나치며 묘하게 재미있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한 명. 오늘 저녁거리를 사러 가다가 맞닥뜨린 이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 더 재미있다. 이번에는 모퉁이와 모퉁이에서 거의 부딪힐 뻔했고 그는 자신이 서두른 탓에 남과 부딪힐 뻔했다는 사실에 당황하다가 내가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것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반가운 놀라움이었고 그는 이내 서툰 한국말로 나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만약 부딪힐 뻔한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그는 죄송합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몇 달 간 그가 거의 날마다 들렀던 카페에서 일을 할 때 그는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나에게 하루 안부를 물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건네주던 사람이었고 나와 그 사이에는 꼭 그만큼의 사소한 유대가 있었다. 그 참 별것 아닌 유대.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그는 오늘의 우연에서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몇 달 간 숱하게 보던 그 얼굴들을 또 몆 달 간 아예 잊고 살았음에도 어떤 우연의 일치로 새로운 계절에 다시 알아보게 된 것. 그리고 그저 사라졌으리라고 여겼던 사소함이 한 층 더 쌓아진 것. 그로 인해 한 번 더 웃을 수 있게 된 것. 유머나 장치로써가 아닌. 진짜 삶의 진짜 연속성으로써 드러난 것. 그러한 우연이야말로 어쩌면 필연이고 인연인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 나는 난해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종착지에 다다를 삶이라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난해한 무언가나마 있는 것이 그나마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기는 하다.
우리를 갈라놓은 무수한 우연의 파편들. 그러나 그 감정의 홍수 속에서 죽음보다는 삶과 더 가까운 어떠한 표상이 부표처럼 떠오를 수만 있다면. 그들의 이름들을 엔딩크레딧에 새겨놓아도 좋겠다. 인연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겠다. 내가 쓴 글. 내가 낸 목소리. 내가 띄운 웃음. 그 무엇 하나라도 아직은 젊은 이 나날의 부끄러움 위에 차곡차곡 쌓여 핏자국으론 얼룩지지 못할 흰 발자국을 남길 수만 있다면. 거기엔 꼭 고요함이 없고 강인함이 없어도 좋다. 이다지도 나약한 채로 살아가도 좋다. 그저 내 자신 앞에서만큼은 부끄럽지 않은 채로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된다면.
그건 내가 아직도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