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의 편지] 이야기 열넷
그러나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 꿈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어. 더 끔찍한 기억을 잃기 위해서 덜 끔찍한 기억을 담아두기 위한 서랍을 짜맞추지. 그럼으로써 서랍에 담기지 못하는 것들은 소리 없이 폐기되기만을 바라면서.
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로 꿈을 더 많이 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약을 끊지 못하겠지. 이젠 심장이 빨리 뛸 때도 약을 먹어서가 아니라 약을 평소보다 늦게 먹어서일 거라고 나도 모르게 인정하게 되니까.
하루라도 꿈을 꾸지 않으면서 잠들고 싶다.
하지만 그러려면 영원한 수면을 꿈꿔야 하는 거겠지.
아직 그러지 못한 나에게는 이렇게 하루가 또 시작돼. 아프지도 않은 이런 상처만을 자꾸만 늘려가면서.
삼 년 전 여름으로부터.
그래서 또 하루가 시작된다. 미명계 속에서 하늘은 고요히 밝아오고. 어둠의 시간은 달빛과 함께 아스라이 높아져 우리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유유히 빠져나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걸 믿는 건 우리가 또 그만큼의 시간을 살아냈기 때문이겠지. 한 달 전만 해도 겨우 내 손바닥 두 뼘만 한 높이였던 내 텃밭의 방울토마토들이 살그머니 말 없이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떨구는 것처럼. 삶이란 그런 것이다. 세월의 빛과 그림자 속에서 가장 밝은 곳으로 뻗어나가는 것. 그리고 결실을 내고 그것을 알아봐줄 누군가에게 그를 들키는 것. 그럴 수 없다면 썩어 문드러지는 열매의 고통을 그대로 감내하는 것. 그들이 다시 태어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 모든 순리를 거스르려는 건 나뿐만이 아닐 텐데. 어째서 다가오는 아침마다 이토록 외로운 기분이 드는 걸까. 나도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매일의 날마다 자살을 생각하는 내 스스로에 지쳤어. 하지만 자살의 상상을 그만두면 또다시 공허의 출발점에 서게 될까 봐 겁이 나.
그러니까 차라리 조금 미리 돌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열매가 아닌 꽃을 떨구는 뿌리처럼. 그건 역행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의미에선 최대한의 달성이다. 그 뿌리에게 남은 선택지가 단지 그뿐이라고 한다면.
삼 년 전 여름으로부터.
의사를 만났고 약이 더 늘었어. 벌써 여섯 번째 회기였다.
의사는 불안한 감정들이 조금 나아졌냐고 물었고 나는 빨간 약을 다 먹었다고 대답했어. 나는 기계처럼 내 증상을 보고해야 할 때가 싫어. 에러라는 글자가 심장에 크게 뜬 안드로이드가 된 것 같잖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없고. 나는 정형화된 크기와 높이의 마음만을 가진 환자가 되어야 해. 그래야 약을 더 쉽게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문득 나는 이때까지 진료실에서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나의 본성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지도 모르겠어. 어딜 가나 잘 웃는 그 사람은 그저 내 껍데기를 흉내내기 위한 가면이고 진짜 나는 새하얀 벽돌처럼 굳어서 그 속에서 절대로 벗어나려고 하지 않지. 그냥 그런 거야. 어쨌거나 내 약이 더 늘어난다는 건 변하지 않고. 나는 또 애꿎은 처방전만 한 장 들고서 밖으로 나와.
그리고 내가 아직도 죽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에게 다시금 자백해.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그래서 나는 내 글 안에 숨어서도 환자밖에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조차 언젠가는 포기할. 그리고 영원히 그대로 밀봉될.
삼 년 전 여름으로부터.
추신.
최근 들어 집 안에서 정적이 느껴지는 게 싫을 때마다 기타를 쳤더니 벌써 왼손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새로 박혔다. 이로써 좋아진 점은 담뱃불을 맨손으로 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레코드를 자꾸만 잡았더니 약지를 움직일 때마다 달각달각 하고 뼈마디 튕겨지는 소리가 난다. 이로써 좋아진 점은. 그냥 바레코드를 예전보다 더 잘 잡게 되었다는 거겠지.
몇 년 전 처음 기타를 배울 때는 손이 너무 작아서 바레코드는 못 잡을 테니 그냥 대충 비슷한 코드로 옮겨서 치라는 조언을 들었었다. 그러기가 싫어서 소리가 잘 안 나도 매번 정석대로 잡는 연습을 했고. 그렇다고 딱히 날마다 꾸준히 친 것도 아닌데도 몇 년의 시간이 지나자 뼈의 형태가 조금 변했다. 굳은살도. 한동안 손놓고 있으면 잠깐 사라졌다가 또 한동안 바짝 치다 보면 금세 지문이 사라질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마음도 딱 이만큼만 쉽게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앞서가기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딱 몸이 변하는 속도만큼만 따라와 준다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느샌가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겨버린 나는 예전과 같이 그렇게 죽고 싶다는 말을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나만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있고. 아무리 그것이 그저 우연과 우연과 우연들의 교집합에서 비롯된 결과이며 따라서 내 의지가 섞인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싶다고 해도 어쨌거나 그걸 홀로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나도 알고 있다. 이젠 더는 간단하게 죽어버릴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기로부터 미련 없이 도망치고 싶어질 때면. 어쩌면 이것은 애초에 자유라고는 끼어들 수 없는 한 편의 완성된 영화의 끝없는 재생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하는 지리멸렬한 공상 너머로 종종 침전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고. 그 영화를 보는 사람이 나오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또 그 영화를 보는 사람이 나오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 나오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다. 이 이미지가 영원히 반복되고 나 역시 그저 그 이미지 가운데 단 하나의 프레임일 뿐이라고 한다면. 내가 그 중에 몇 번째 사람인지가 왜 중요하겠는가. 그리고 내가 거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모든 건 이미 정해져 있고 나는 그저 그 사이에 낀 톱니바퀴일 뿐인데. 모든 건 실재가 아닌 홀로그램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느끼는 감정이나 소위 마음이라는 것의 존재가 이 세상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비참하게도 삶은 그저 삶이고. 내가 어떤 식으로건 세상을 인식하는 한 나는 그저 장기판의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의심이 많은 나는 신을 믿는 것도 불가능한 심성을 지녔다. 그래서 스스로를 운명론자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운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끊임없이 의심하고. 단 한 가지의 진리 따위를 언젠가라도 깨닫게 되리라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고난을 겪고 나서 어떤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어차피 사람의 삶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설령 있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흩어질 허상 내지는 신기루밖엔 아니다. 어쨌거나 사람은 멈춘 상태로는 있을 수 없다. 지금 이 자리가 아늑하다고 해서 끝도 없이 고여 있을 수는 없다. 살아있기에 나아가야 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삶은 홀로그램 따위가 아니다. 진리의 틀에 박힌 톱니바퀴도 아니다.
그렇기에 불안해하고 불행해하고 중첩되고 충돌하고 흔들리고 몰아치는 그 모든 촛불들이 마음의 가장 어두운 공간에 빛을 밝혀. 그럼에도 살고 싶어 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음이 흘러가는 만큼이나마 변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결국은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내가 예전에 쓴 글이 싫어지는 순간을 바라며 글을 썼다. 지난 날에 내가 썼던 글을 읽다가 불현듯 이게 너무 싫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 오면 바로 그 간극만큼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이리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지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비루하게도 삶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어쩌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칠 때. 바로 그런 때가 삶에는 가장 큰 고통이다. 어디로든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 차라리 어차피 어디에도 온전히 섞여들지 못할 내 의지 따위는 완전히 사라지는 세상이었으면 하고 바랄 만큼. 과거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아직도 그를 붙들고 있다는 것은. 다만 이런 것이다.
그래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나와 죽도록 잊고 싶은 기억임에도 잊지 못하는 내가 있고. 그 한 켤레의 자아 속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는 끝끝내 식별되지 않는다. 단지 내게 주어진 기억이 재생하는 과거를 헤집으며 오늘의 나를 용서하기 위한 아주 미세하고 자그마한 단서조차 놓치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그래. 사실은 모두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과거의 어느 날에 피해자였다는 이유로 미래의 어느 날에 가해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강박.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내가 어릴 적 보았던 그들이 세월이 갈수록 일그러졌던 것과는 다르게. 나는 차라리 평생을 피해자가 될지언정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해자만은 되지 않겠다고. 나 자신을 아프게 할지언정 타인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고. 내가 아닌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는 않겠다고. 그것만이 더 나아지는 것이라고. 그런 구속만이 내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고 시간의 흐름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었다.
그래서 글을 쓸 때에 늘 그렇게 했듯이 삶에서도. 거듭 지우고 또 지우고. 갈아엎고 또 갈아엎고. 마치 밭을 갈듯이. 아무리 모조리 지우고 덧씌워봤자 그 위에도 흔적은 남는다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도 그럼에도 이로써 뭔가 단 하나라도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게 나를 갉아먹을 대로 갉아먹으며 살다가. 실제로 정말로 무언가가 나아진 것이 보이고 나면 어쩐지 그것이 또 두려워져서 그만 쉽게 손을 놓아버린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을까. 이미 나아진 것에는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그 사실이 두려웠을까. 아니면 그저 고여 있는 것이 두려웠을까. 이것을 두고 나는 어느 계절엔가 부평초라는 이름을 붙여준 적이 있다. 그래. 뿌리가 버거운 삶이다. 비롯된 곳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또 비롯될 곳을 찾는. 참 징그럽고도 슬픈 족속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살 수 있는 삶이었다.
버드나무는 죽어갈 때에 홀로 죽어가지 않는다. 그는 원줄기에 모여든 온갖 미생물들과 날벌레들과 함께 서서히 부패되며 죽는다. 그래서 그 켜켜이 쌓인 죽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빛을 발한다. 그 차가운 빛을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도깨비불이라고 불렀다.
누군가에게는 그 작디작은 몸들이 한데 뒤엉켜 맞이하는 죽음이 꺼림칙하고 거북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단지 하필이면 그 물가에 있던 버드나무에 하필이면 그 물가에 취해 날아든 별것 아닌 생명들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만들어낸 지극히 우연한 발화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들이 다른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고 그저 서로가 서로의 무덤이 되어 조용히 품다가 사라진다면. 그리고 이로써 또 다른 생명들이 살아갈 여지가 생겨난다면. 이것은 이 과정 자체로 하나의 삶이다. 결과가 초라한 것을 넘어서 정말로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그 누구의 앞길도 온전히 밝혀줄 수 없을 만큼 미미하다고 해도 도깨비불은 그럼에도 살아있다. 지근거리에서 함께 숨을 쉬었던 그 모두와 함께했기에. 그 책임을 잃지 않았기에. 그것은 사라지는 동안에도. 의지라곤 없이 빛무리에 동화되는 동안에도. 삶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해서 살아지는 삶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