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너머의 아수라

[일전의 편지] 이야기 열여섯

by 온율

오랜 시간이 지나서 새 잎이 돋아나면 날마다의 기억 앞에서도 변화구를 맞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흐름에도 굴하지 않는 뿌리를 내려. 더 깊이. 모든 아픔의 회상을 덮고도 더 깊은 곳으로 뻗어갈 때까지.


사 년 전 여름으로부터.


하루하루 늦어지는 장마 때문에 텃밭에 물을 주는 때가 많아졌어.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젠 정말 여름이라고 흐느끼듯 중얼거렸어.


날마다 떠올려도 날마다 달라지는 비애의 각도 속에서 오늘 하루의 날씨는 새롭게 태어난다. 구름 위를 뚫고 올라 자신만의 빛깔을 찾아내는 한 마리의 새처럼 그것은 아무도 곁에 두지 않고서 외롭게 비행한다. 언젠가의 곤두박질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면서도 결코 두 눈을 감아버리지는 않는 그 의연한 좌절감으로.


장마는 여전히 길어질 것 같다. 도달하는 것도 관통하는 것도.

반짝이다가 햇무리에 닿아 녹아내리는 깃털.

고꾸라진 부리.

구원이라기엔 초라한 생명줄. 주저하며 잡아채는 굳게 내민 손.

내가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몇 안 되는 것들.

그러나 소중한 것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 소중한 사람. 소중한 존재들.

관계의 아픔과 끌어안음의 기쁨.


이 모든 걸 지켜줄 수 있는지. 누군가의 카르마가 묻는다.


사 년 전 여름으로부터.


추신.


피상적으로 알아차리는 모든 것을 아릅답게 여기기는 쉽다. 독버섯을 발견한 순록이 이내 그것에 중독되듯이. 단지 껍데기에 취해서 스스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아 질식시키고도 숨이 막히는 줄도 모르고. 자아라고는 없이 그렇게 영혼을 내주기란 쉽다.

그러나 여기서 이대로 박제되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면. 때로는 아름답지 않은 것에도 믿음을 내주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기억이 머무는 자리가 숲이라면 나의 숲은 밀림이다. 떨궈지는 눈물만으로도 숨가쁘게 자랐고 스며드는 햇살 한 줌이 없어서 섣부르게 웃자랐다.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숲의 방향을 모르면서 나무의 행방을 어떻게 분간하겠는가. 모두들 아스라이 높아서 나를 가로막는데. 기대도 좋을 그루터기 하나가 어딘가에 있다 한들. 나는 그를 찾으러 갈 수조차 없다. 그런 꿈을 나는 꿀 수가 없다.

세상에 병신새끼가 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고아새끼가 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알고 있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다만 나는 이 숲에서 십 년을 홀로 걸었다. 그러니 병이 조금 도졌기로소니 무엇이 대수겠는가. 고립이 조금 깊어졌기로서니 별 특별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만이 돌아갈 곳이 없어 헤매는 것이 아니다. 나만이 생채기로 피투성이가 된 것도 아니다. 나도 알고 있어. 다들 그렇게 산다. 다들 그렇게 사노라고. 누구나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러나 그런 말을 쉽게 내뱉는 이여. 그대는 알고 있는가.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로는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은 찰나의 무마가 될지언정. 결코 구원이 되지는 못한다.


십 년을 한결같이 날마다 생각했다. 내가 오늘 아침에 죽으면 내일 아침이 오기 전까지 불에 태워질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죽으면 내일 저녁이 오기 전까지 불에 태워지겠지. 그래. 사회는. 사회의 공권력은 그러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 그래서 장례를 치뤄줄 이가 없는 사람은 흙으로 돌아갈 꿈조차 감히 꾸지 못한다. 만으로 하루. 그 안에 평생 모르던 사람들의 손을 거쳐 화장당하는 것. 그것이 초대받지 못한 생명을 다루는 우리 사회의 매뉴얼이다. 아니 클리셰인가. 설마 비정한 것 같은가. 뭘 새삼스럽게. 그런 시체들이 피어올라 만들어낸 연기를 들이마시며 지금껏 살아온 우리가 아닌가. 공기처럼 가볍고도 당연하게. 그들은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우리의 코와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와 피에 녹아든다. 그러니까 사실 그건 정말로 사라진 것이 아니지. 죽어서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은 이 정도의 서글픈 농담이다. 이 농담의 다음 주인공이 내가 될 개연성이 너무도 농후하다는 예측은. 그래서 차라리 희극적이리만큼 애처롭다.

그래서 이 우스운 서사의 다음 장에는 비가 내리는가. 그런 불확실성을 담보한 예측이라도 있어야 불이 한시라도 더 늦게 타오를 것이라는 안일한 소망이나마 가져볼 것이 아닌가. 그래봤자 고작 하루에서 하루를 더 버는 별것도 아닌 지연밖에는 되지 못하겠지만.

십 년을 한결같이. 나는 이런 우스운 생각을 하며 이 숲을 맨발로 걸었다. 물론 시간이 흘러서 덜 아프게 된 것들도 있다. 하지만 아픔과는 별개로. 다만 조금 지친 것이지.

그래 다만 조금 지친 것이다.

이 숲의 경계는 숨을 쉬는 한 다다를 수 없고. 나무들의 결계는 너무도 견고해서 이젠 내가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지조차 헷갈리는 것 같아. 알고 있어. 나는 그 어떤 섬세한 필치를 가지고서 그려낸다고 해도 이 울창함의 표면을 완전히 묘사할 수 없다. 몇 장의 지도를 간신히 완성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 지도들을 아무리 열심히 이어붙이고 포개놓아도 온전한 하나에 이를 수 없다. 여전히 가장 끔찍한 장면은 언어의 뒷편에 가려져 있고. 나는 거기로까지 애써 침전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까지 도취되고 싶지 않다. 멈춰 서있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지. 그럼에도 흘러가는 대로는 흘러가야만 하는 시간 속에 있으니까.

아니 시간이 내 속에 있는 건가.

그렇지. 나는 그저 현실을 외면하는 방식의 자위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을 뿐이다.


오른쪽 귀에서 이명이 울린다. 마지막으로 정적을 향유해본 것은 언제였더라. 그렇구나. 이것이야말로 공고한 현실이다. 이렇듯 칼로 찌르는 듯한 이명이. 나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을 틈타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여기에 고무될 정도로 피가 덜 마른 나이는 아니지만. 적어도 다들 이렇게 산다는 그 말보다는 덜 피상적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발을 뺄 수 있다. 나의 숲은 늪은 아니다. 나는 그것까지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도처에 매설된 발화로 충분하다. 보호구라고는 없이 맨발로 덫을 밟아서야 하는 지뢰밭의 위험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충분히 지쳤으니. 그러니 제발 이곳에 넝쿨만이라도 자라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림자로 점철된 표면을 모조리 뒤덮고서도 더 멀리 뻗어나가. 언젠가라도 그 너머의 폐부를 찌를 수 있게.

수천 번 수만 번이라도 그 폐부를 찌르고 또 찔러. 이윽고 이명이 멎는 순간. 사사로이 잦아든 나의 숨결이 불이 아닌 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단지 그렇게 하기 위함으로라도 이 숲을 박차고 나가서.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던 믿음. 그 믿음을 이젠 데리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