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하루 세 번 식후에 꿀꺽 삼키세요
어린 시절 약국집 애였던 나는 알약과 함께 자랐다. 당시에만 해도 가루약을 조제하려면 전기믹서기보다도 손으로 직접 빻곤 했기에 약사였던 어머니는 손님도 아닌 애새끼 먹일 약까지 빻아주기 귀찮다며 나에게도 알약만 먹게 했다. 다섯 살 때 감기엔가 걸려서 커다란 항생제 알약을 처방받았을 때도 그걸 육 등분까지 해서 그냥 삼키도록 했을 정도니 약국을 찾는 취학 연령 환자의 보호자들이 아이가 알약을 못 삼킨다며 가루약으로 달라고 하면 다 큰 애 데리고 와서 유난 떤다며 조제실 뒤에서 욕을 바가지로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내겐 그저 일상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면허증이 없는 알바를 고용해 노가다 같다던 그 알약 빻는 일을 죄다 떠넘기곤 했다. 그 외에도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할 중대한 약사법 위반이 헤아릴 수도 없이 벌어졌던 그때의 이런저런 경험들도 미뤄보면 내 어머니가 소속된 약사회를 포함한 우리나라 의료계의 현실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무법지대로밖엔 여겨지지 않을 수준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돌팔이에 사기꾼이라며 불신하면서도 언론 등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올 땐 기가 막히게 똘똘 뭉쳐 이권을 위해 담합하는 괴팍하고도 강력한 공동체. 보고 자란 게 그것뿐인 내가 차츰 흰 가운이라면 몸서리치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따금 약국에 가서 찬장마다 알약에서 나온 분진이 켜켜이 쌓인 묵직한 냄새를 맡으면 꺼림칙한 굴욕감과 동시에 아련한 향수가 몰려오곤 한다. 어쨌거나 초등학생 때까지 학교보다도 더 오래 머무른 공간은 약국 조제실 뒤편의 먼지 가득한 약품 창고였고 그곳에서 나는 학원 숙제를 하고 천자문 만화책을 읽고 애국가 가사를 외우며 대부분의 시간을 그 지독한 공기 속에서 보냈다. 반장 선거에서 이기면 다른 아이들은 햄버거나 크림빵을 돌렸지만 나는 구충약과 비타민약을 돌렸다. 김영란법이 없던 시절 방학이 끝나고 첫 수업을 하는 날마다 다른 애들 안 볼 때 선생님께 몰래 드리라며 어머니가 내 손에 들려줬던 것도 고급 영양제나 제약회사에서 출시한 화장품 세트 같은 것이었으니 더 말할 것이 있을까. 딱히 내 학교생활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어머니 스스로 내가 이런 사람이다라고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만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내 어리고 미숙한 두뇌의 자아 형성에 기여했었다는 사실을 먼 훗날에야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아득히 멀어진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나도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 섞인 환멸에 짐짓 취할 만큼. 인정하기 싫지만 어쩌면 이것은 내 유년에 대한 증오 이상의 애증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나름대로 의료계를 기피할 만한 상당히 구체적인 사유를 가지고 있는 나조차도 그 힘에 기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현대사회였고 그렇게 성년 이후로 내가 처음 정기적으로 찾게 된 의원은 특별할 것도 없이 정신과였다. 사실 불안정한 성장기를 보낸 초년생 직장인이 지병이 없을 경우에 꾸준히 방문하게 되는 의료기관이 정신과 말고 또 어디겠는가. 우울하면 우울증이요 죽고 싶으면 정신병인 요즘 문법에 따라 나 역시도 우울해서 죽고 싶을 때 결국은 정신과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건 몸이건 아프면 일단 돈을 내고 진료를 받아야 하는 세상. 그나마 청년사업의 일환으로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처음 세 번의 처방은 무료였다는 것이 그 당시만큼은 황송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세 번 이후로 이 년 가까이 복용을 이어가게 되면서 내가 그 정신과에서 지불한 비용을 다 합치면 어림잡아 칠십만 원 돈이다. 그게 진심으로 죽고 싶어 몸부림치던 내 이십 대 한때의 값이었다. 상황에 따라 한없이 큰 돈일 수도 있기에 우습다곤 못 하겠다. 다만 좀 씁쓸할 뿐이다.
다만 매주 나를 진료하던 의사에게도 늘상 얘기했듯이 과연 내가 먹은 그 알약들이 정말로 내 부정적인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약을 먹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를 증명할 수 없으니 결국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제약회사는 임상실험이라는 제법 우아한 표현을 앞세우기도 하지만 사실 그게 나에게 어떻게 얼마나 적용될 것인지를 누가 확신하겠는가. 이런 시대에 태어났으니 시대의 요구에 따라 마음의 병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남들 다 하듯이 치료를 받지만 그게 정말 유의미한 치료였는지를 성급하게 판단하기에 정신의학의 역사는 너무도 짧았다. 그리고 그 위대한 의학은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동성애자를 전기의자에 앉혔고 광증으로 진단된 환자의 전두엽을 메스로 갈랐다. 그런데 우리의 당대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급작스레 신뢰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단지 전기의자보다 알약이 더 고상해서라면 그건 너무 무책임하다. 내 인생의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의사가 아닌 나 스스로에게 지울 용기가 남아있다고 한다면.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년 전에 진료실의 의사 맞은편 의자에 앉아 펑펑 울며 오늘부터 약을 꼭 먹어야 한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그 순간만큼은 나는 그 책임을 내가 아닌 의사의 처방전에 모두 줘버렸던 것 같다. 대학생 나이에 데뷔한 가수 라우브가 약물치료 경험을 담아 쓴 노래의 가사처럼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뒷좌석에 앉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앞좌석에서 대신 운전대를 잡아준 사람한테 어쩌면 그대로 뒀어도 직진만 하며 잘 굴러갔을지도 몰랐다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것 이상으로 무례한 것 아닌가. 따라서 나는 나를 이 년 동안 알약의 노예로 만든 그 의사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 비록 진짜 그대로 가만히 뒀어도 감기처럼 알아서 나을 병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비록 그 알약들 때문에 오히려 애꿎은 위염만 키웠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다만 약을 끊어가기 위해 날마다 복용하던 용량을 이틀에 한 번으로 나누기 시작하면서 경험해야 했던 신경성 손 떨림이라는 금단증상은 그야말로 전기충격을 받는 것과 비견할 만하다는 걸 미리 알려주지 않은 것은 상당히 괘씸하기는 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요즘 의사에 걸맞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디에 가도 마음의 병 운운하는 세상에서 정신과는 여전히 성업 중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운전석에 보조장치를 달아주는 것과 아예 운전대를 대신 잡아주는 것을 똑같은 행위로 치환시킨 것이 환자들을 끊임없이 불러 모아야 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의료인들에게는 진정한 신의 한 수이지 않았을까. 동그랗고 납작하고 작은 물체를 꿀꺽 삼키기. 이제 이 행위는 마치 문명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심지어 당장 나조차도 만약 알약을 삼키는 것 외에 다른 무언가가 요구되었더라면 정신과에서 치료를 이어가길 꺼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알약이란 너무도 친밀하고 간단하다. 비타민도 세로토닌도 발음도 쉽지 않지만 하여간 독일식 작명을 따른 이런저런 성분들도 모두 한 번에 꿀꺽 삼키면 그만이다. 과거엔 소화가 안 되면 숭늉을 끓이던 사람들은 이제 소화가 안 되면 알약을 삼킨다. 그리고 피곤해도 알약을 삼키고 죽고 싶어도 알약을 삼킨다. 이 증상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본능이라는 감각으로 간파하는 능력은 이 편리함 속에서 유명무실해졌다. 소는 사람보다 영민해서 열 걸음 안에 자신을 낫게 할 약이 있는 줄을 안다고 한 세기 전의 백석 시인은 썼다. 그리고 오늘날 소보다 영민한 제약회사들은 열 걸음 안에 공장에서 찍어낸 알약을 판다고 광고한다. 물론 열 걸음이나 가는 운전이 부담된다면 그 또한 제약회사가 대신해줄 것이다. 그들에게 낼 돈만 있다면.
그러나 이렇듯 모든 것을 알약으로 통하게 하는 현대의 마법이 적게는 내 인생에 대한 책임감을 크게는 근본적인 인간성을 상실시키는 데 일조한다고 여긴다면 지나친 비약인 걸까. 제약회사들이 온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는 엄청난 음모론이 아니더라도 돈과 돈이 오가는 의료계의 지저분한 현실은 이미 그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도덕적인 무결성을 기대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그리고 많은 순간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이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이 전부가 다 간편하도록 같아도 되는 걸까.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벅차서 안달복달하는 일개 개인이 해답을 구할 수는 없는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힘을 합쳐 그 질주를 잠시나마 멈출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죽도록 괴로워서 머리를 감싸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을 때 너 혼자 안 될 것 같다며 운전대를 대신 잡아주기보다 이럴 땐 갓길에 차를 세워도 된다고 알려줄 누군가가 있다면. 정신과에서 받아온 첫 알약을 삼킬 때 내가 진짜 원했던 건 실은 처방 따위가 아니라 대화할 사람이었다. 의사나 심리상담사가 아닌 대화할 사람. 돈을 내지 않아도 나와 대화를 나눠줄 사람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서 나는 알약의 힘을 억지로 믿었고 그에게 내 모든 방향과 진로를 맡겼다. 그것이 사회가 정의한 치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전한 인간으로서 합의한 치유는 아니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그때 내 자동차의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내가 결정한 것은 단지 맡겼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무엇이어도 상관없는 상태로.
고아원이나 보육원에서 원생들에게 가장 많이 먹이는 것이 알약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심지어 열 명 중 여덟 명이 성인이 되기 전 정신과 약을 복용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대체로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돈으로 형성되지만 거기에서는 그것이 운명으로 형성된다. 억지로 운전석에 앉을 기회를 빼앗는 것을 넘어서 아예 바퀴에 매달고 질질 끌고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럼에도 이런 행위 역시 겉으로 보여지기에는 똑같다. 결코 악의적이지 않은 지극히 일상적인 관성의 반복. 정말로 무서운 것이 이것이다. 선택권을 손에 쥐고 태어나도 쉽게 잃고 내어주곤 하는 것이 인간인데 이렇듯 처음부터 가지지도 못하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그리고 그걸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는 세상이 되고야 만다면. 인간과 인간의 사회는 얼마나 더 비굴하고 무참해질 것인가. 아마도 오아시스가 말라버린 사막과도 같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전부가 산산이 분해되어 매캐하게 흩날리는 모래폭풍처럼 우리의 시야를 계속해서 가로막는다면 그 미래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질식할 것만 같은 동그라미와 동그라미의 가장자리에서 그 사이사이를 아주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그 무언가로 채울 용기를 낼 수 있다면 브레이크가 없는 듯한 이 현실도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겪었던 것에 대한 그리움은 나만의 것이지만 겪지 못한 것에 대한 기대감은 나와 닮은 사람들 모두의 것이기에. 제약회사라는 것이 존재하기도 전의 훨씬 옛날부터 사람들은 인간이기에 품을 수 있는 그런 기대감을 온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런 온정들이 모여 온기가 되고 그런 온기들이 모여 다시 개개인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그런 순환. 절대로 하나의 일정한 형태를 띤 물체로 치환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생명이라는 것임을 어쩌면 우리는 새롭게 발견하고 싶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제 대화를 하고 싶다. 내가 잘 아는 사람들과. 그리고 아직 낯설지만 그 너머에 있음을 깨달아버린 사람들과. 두 번 다시는 운전대를 놓지 말아야 한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설령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적어도 두려움은 버리고 싶다. 한쪽 문으로만 통하는 길은 없다. 그리고 한쪽 문이 닫히고 다른 쪽 문이 열리지 않아도 괜찮다. 그럼 그냥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면 된다. 그래도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길 바라는 것을 넘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진정한 선택에 다다를 때까지 나 자신을 다그치지 않을 권리를 단지 달리는 속도를 위해 포기하기엔 나의 마음은 적어도 알약 한 알보다는 더 따뜻하다는 걸 잊지 않는 어른으로 남고 싶다. 그래야만이 그 작고 동그랗고 정적인 무자비함으로 뒤덮여진 내 십 대와 이십 대를 해방시키고 다채로움이라는 바람 속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이끌 수 있을 것 같다. 느리고 굼뜨고 휘청거릴지라도 땅에 디딘 내 두 발로도 충분히 이어갈 수 있다는 걸 단지 살아냄으로써 입증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이젠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