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서는 안 될 그날의 죽음들을 위하여
내가 죽음을 접한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때의 것이다. 숱한 계절들을 거쳐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뿌옇게 희석돼간 여느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달리 이 기억만은 아직까지도 새하얀 벽에 굵은 마카펜으로 칠해놓은 듯 선연하게 떠오른다. 그날부터 죽음은 줄곧 그런 것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들먹이지 못하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결코 없는 척할 수만은 없는 것.
그 아이와 나는 같은 계절에 태어났었다. 어린이집 입학식을 치르고 난 첫 생일파티를 그 아이와 같이 했다. 어색하게 고깔모자를 쓰고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가져온 케이크를 앞에 둔 채 둘이 나란히 서서 필름카메라를 바라보던 그날의 온몸이 근질근질한 것처럼 달아오르는 감각도 여태 뚜렷하다. 언뜻 옆을 힐끗거려 봐도 그 아이는 미동도 없이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해지기 어려운 애네. 별로 떨리지도 않나 봐. 생일파티란 게 처음이 아닌 걸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리고 그게 그 아이의 마지막 생일파티였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름이었다. 나는 그 무렵 거의 어린이집의 지박령과도 같은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종일반이 없었던 그 어린이집의 운영방침에 대한 내 어머니의 해결책이란 간단했다. 그냥 날이면 날마다 어린이집의 모든 선생님이 퇴근하기 직전까지 나를 데리러 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아이들이 모두 집에 간 뒤부턴 해질녘까지 어린이집의 이 층짜리 건물 여기저기를 원숭이처럼 혼자 쏘다녔다. 또래에 비해 보채지도 않고 잘 울지도 않던 나는 다행히도 선생님들한테 꽤 예쁨 받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업무가 가중되는 걸 기꺼이 달갑게 여길 정도는 아니라서 사실상 어린이집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알아서 놀도록 방치되곤 했다. 가끔 울타리 밖으로 나가 찻길을 어슬렁거려도 당연히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그날도 그랬다. 다른 날들처럼 하루종일 심심하게 지나갈 것만 같았던 그날 갑자기 불이 몇 개 켜지지 않은 어린이집 사무실에 낯선 손님들이 찾아왔다. 손에는 내 몸통만 한 수박을 들고 있었다. 손사래를 침과 동시에 그 큰 수박을 받아드느라 사뭇 곤란해진 선생님을 나는 덜 닫힌 유리문 너머로 빼꼼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친 손님들은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원생이 있는 줄 몰랐다며 놀랐다. 나를 손짓으로 부르며 애써 빙그레 웃음 짓는 얼굴. 그들은 작은 접시에다 어린아이 입에 맞게 작게 썬 수박과 포크를 들려주며 옆방으로 가서 맛있게 먹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옆방에 들어와서 포크를 집어든 순간 들려오는 흐느끼는 울음소리. 그 사람들은 나와 생일파티를 했던 그 아이의 엄마와 아빠였다. 일부러 다른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 맞춰 방문한 그들은 어린이집에 남아있던 아이의 유품을 가지러 온 것이었다.
나는 결국 그 수박을 하나도 먹지 못했다. 그리고 선생님들도 모두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이의 사인은 급성 폐렴이었다. 하지만 곧잘 감기에 걸리곤 하는 그 나이 때 아이들이 공연히 겁먹을 것을 우려해 다른 아이들에겐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날 그 아이의 부모가 찾아왔을 때 그곳에 함께했던 나만이 그 아이가 죽었다는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했는지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이후로 같은 반 아이들이 그 아이의 빈자리를 궁금해할 때마다 들을 수 있었던 아주 멀리 떠난 거라는 그 말만은 거짓말일 거라고 어렴풋이 인지하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멀리 떠났다는 건 나도 그 멀리로 가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죽음은 그런 게 아니었다. 죽음은 이미 지나간 계절처럼 미래와 비슷할 수는 있어도 결코 똑같은 것으로 되돌아올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빈자리였지만 그 둘은 무척 달랐다.
보다 명확하게 죽음을 깨우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나는 아홉 살이었고 어느 창의력 수학 경시대회인가 하는 것에서 어쩌다가 전국 일 등을 하는 바람에 대뜸 내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학원 선생님들에게서 의대지망생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반에서 일 등을 하는 것 정도로는 우리 집안 사람들은 다 그렇다며 별로 신경 쓰지도 않던 어머니는 전국이라는 그 한마디에 귀가 번쩍 뜨여서 벌써부터 의사 딸래미를 만들 생각에 잔뜩 부풀어서는 그 근방의 내로라하는 수학 과학 학원에 죄다 원서를 돌리고 레벨테스트를 치게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나는 뭔지는 잘 몰라도 어쨌든 어머니가 모처럼 나에게도 관심을 갖는 것 같아 기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기대감에 부응하며 노력했다. 대체 왜 수학을 잘했는데 의대에 가야 하는지 도형의 넓이를 구하는 것과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좌우간 무슨 인과가 있는지는 너무도 당연한 듯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그래서 나도 별로 의아해하지 않았다. 마치 삼 곱하기 삼이 구이듯 그것만이 세상의 공식인 것 같았고 그것만이 나를 인정해주는 것 같았다.
그날도 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느 과학 학원에 들어갔다. 우수한 이과 영재를 배출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그 학원의 원장은 내 레벨테스트 결과가 잘 나왔다고 칭찬하며 나를 한 교실에 데려다 놓았다. 그곳에선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해부학 수업이 막 진행될 참이었다. 수업을 주관하는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가정통신문을 나눠주듯 개구리의 사지를 압핀으로 고정한 판자를 나눠줬다. 내 앞에도 볼록한 배를 하늘로 향한 채 꿈쩍 않고 누워있는 개구리가 배정되었다. 보통 고학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개구리 해부 수업에서 나는 가장 나이가 어렸다. 주위를 곁눈질했지만 가만히 책상에 앉아 개구리들을 쳐다보며 수업종이 치길 기다리는 언니 오빠들의 침착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압도될 뿐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에게는 직접 메스로 배를 가르라고 지시하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너는 나이도 어리고 해부가 처음이니까 오늘은 특별히 선생님이 갈라줄게. 하지만 다음부턴 니 손으로 해야 될 거야.
묘하게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에 충동적으로 들어버린 반발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선생님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 개구리는 수업이 끝나도 안 죽나요.
놀랍게도 선생님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럼. 이건 죽인 게 아니라 마취한 거야. 마취가 풀리면 다시 살아나는 거지.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어른들도 때때로 거짓말을 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 나이였지만 그래도 그 말만은 진실일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미 내 몸에 그 증거가 있었다. 나도 신생아 때 개복수술을 받았지만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내 배꼽 위에 일자로 그어진 수술 흉터에도 나는 멀쩡하다. 그러니까 이 개구리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개구리의 몸에 비해 칼이 그어진 길이가 좀 긴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무 문제없다. 수업만 끝나면. 어떻게든 수업만 끝나면 나처럼 살아날 테니까.
나는 한 시간 남짓의 그 수업에서 우수 리포트를 제출했다고 또 한 번 칭찬을 받았다. 개구리의 장기를 일일이 묘사한 내 그림의 정밀성과 정확성이 탁월하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기분이 좋았다. 어쨌거나 어른한테 칭찬을 받으며 주목을 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는 오늘 모든 걸 잘 해냈다.
그런데 불현듯 개구리가 압핀에 사지가 고정된 그 상태 그대로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적나라하게 벌어진 몸통과 네 개의 발이 일제히 가늘게 떨렸다. 마취가 풀렸다. 이제 선생님이 얼른 고쳐줘야 했다. 의사가 되는 수업이라고 했으니까 개구리를 고치는 것쯤은 선생님한텐 일도 아니겠지.
선생님은 수업이 끝났으니 다들 집에 가라며 교실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그 한가운데서 선생님이 개구리의 압핀을 하나하나 뽑아내고 파란색 플라스틱통에 던져넣는 게 보였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아이들의 수만큼 많은 개구리들이 통을 가득 채웠다. 언제 다 고쳐주시려나 조마조마하며 기다리고 있던 내 두 눈에 이윽고 통의 뚜껑을 닫는 선생님의 재빠른 손이 느린 속도로 들어왔다.
그때서야 나는 깨닫고야 만다. 저 통이 열리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그 파란색 플라스틱통 안에 든 개구리들은 그날 모두 죽은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 다른 해부학 수업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사가 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른들 앞에서 어른들이 되라고 한 무언가가 되지 않겠다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어른들은 그것을 실패로 이해했다. 즉 어린 나이부터 생체를 가르고 피를 만지는 데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기 위한 그 수업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라고. 원래 아무리 연습해도 피를 무서워하는 애들이 있다며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 을러댔지만 내심 아쉬워하는 기색들은 역력했다. 그렇게 나는 우수한 의대지망생 인재 풀에서 퇴출되었다. 그리고 수업은 당연하게도 계속 이어졌다. 예비 중등반의 해부 대상은 비둘기랑 토끼라는데 정말로 이대로 포기할 거냐고 어머니는 이따금씩 들쑤시듯 물었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그 수박만 한 플라스틱통에 담긴 개구리들이 끝도 없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개구리들의 통 안에 비둘기와 토끼의 무리까지 욱여넣을 자신만은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순간에 실패자가 되었고 어머니를 실망시켰다.
그때 든 죄책감은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 개구리였을까 어머니였을까.
나는 아직도 피냄새를 맡으면 온몸을 뒤틀던 그날의 개구리가 일렁인다. 개구리의 피도 사람의 그것처럼 미끈하고 빨갛다.
그리고 비둘기의 피도 토끼의 피도 그 아이가 마지막까지 토했을 그 피도. 모두 미끈하고 빨갛다.
그것이 내게는 죽음이었다.
죽음은 부끄럽고 험하고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론 거짓을 꾸며내서라도 어떻게든 숨겨야 하는 것. 그것이 대다수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하달해 온 죽음의 매뉴얼이었다. 추모는 신성한 것이지만 살아남은 이들의 평범한 생활을 해칠 만큼 과해서는 안 되며 특히나 고귀하지 않은 것의 죽음과 천륜을 거스른 죽음은 더더욱 그렇다. 내 어머니에게는 오빠가 한 명 있었지만 그분이 찍힌 가족사진은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부모보다 앞서 요절한 불효자의 존재를 겉으로 떠벌리는 건 창피한 일이라며 할아버지가 모두 없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죽음들이 그렇게 기억에서 도려내지고 추억을 박탈당했는지 나는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다만 술만 마시면 죽은 오빠의 이야기를 꺼내는 어머니를 보며 만약 오빠에 관한 것들을 술을 마시지 않고도 더 자주 꺼낼 수 있는 환경이었더라면 어머니의 어딘가 뒤틀린 듯한 생명감수성도 조금은 치유될 수 있지 않았을까 때때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플라스틱통에 담긴 개구리를 되살리는 것만큼이나 아득히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가 해부학 수업을 기권한 꼭 그 무렵부터 자기의 주술 한 번이면 누구든 살리거나 죽일 수 있다고 믿게 만들던 사이비교주의 광신도가 되어갔다.
그래서 나는 드물지 않게 그 여름에 죽었던 아이의 부모를 떠올린다. 어린 자식을 잃은 그 경황없는 와중에도 선생님들을 뵙는다고 수박을 사들고 와서 딸과 같은 반이던 아이에게 먹기 쉽게 깎아주던 그 엄마와 아빠의 미소와 통곡을. 어쩌면 그들은 내가 자신들의 딸이 생일파티를 한 날 찍은 사진 속에 같이 서있던 그 아이라는 걸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그 사진을 부정 탄다며 없애버렸을까.
그러나 내게 자상하게 웃어 보이며 그릇에 포크를 올려주던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들은 아이를 잃은 지 이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리라고. 때로는 추억하며 때로는 애틋한 기억 속에서 다시 눈물 흘리며. 여전히 그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그것만이 차례차례 죽어감을 목도한 그 계절들을 오롯이 되감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리라고 감히 자신하고 싶다.
글의 제목은 아마자라시의 季節は次々死んでいく에서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