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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율 Nov 25. 2023

가난의 단맛

리셋된 인생에서 맨몸으로 살아남기

십 대가 끝나고 사회에 나와 얻은 첫 일자리는 주방이었다. 계약서 상으로는 오전 열 시에 출근해서 오후 열 시에 퇴근한다고 되어있었지만 실제로는 밀린 뒷정리와 재료 손질을 하느라 자정이 넘어 퇴근할 때가 많았다. 사장은 그때마다 추가수당 대신 택시비 만 원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래도 기뻤다. 돈보다도 내 힘으로 일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기뻤다. 과거를 가능한 덜 떠올리려고 일부러 하루의 절반을 일하는 강도 높은 스케줄을 골라 자원했다. 하루종일 수십 포대의 마늘을 썰고 수백 장의 접시를 닦고 수천 그램에 달하는 파스타면을 일일이 저울에 달아 비닐봉지에 넣는 끝도 안 보이는 일을 무한정 반복하다 보면 내가 이전까지 알던 나의 모습이 조각조각 와해되는 듯한 괴리감이 들면서 머나먼 옛날에 겪었던 그 온갖 것들이 전부 아무것도 아니었던 듯 느껴졌다. 그래서 기뻤다.

     하지만 가게에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다 제각기 집으로 떠난 뒤 홀로 지폐 한 장을 구겨 넣은 낡은 잠바를 걸친 채 밖으로 나서면 느린 발걸음을 따라 촘촘히 눈을 뜨는 판도라의 잔해들. 낮에는 휘발되었다가 밤이 되면 공기의 표면마다 다시 차갑게 맺히는 이슬처럼 그것은 내가 어떤 하루를 보냈건 반드시 하루 끝에는 되살아나 지독하게도 내게 매달렸다. 그리고 노동에 혹사된 어깨 위에 무너지듯 포개져 다음 날이 밝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갓 성년이 된 이십 대 초반에 아무런 경력도 보증도 없이 일을 구하기란 그 자체로 쉽지 않다. 그나마 면접이라도 볼 수 있는 곳은 최저시급이거나 그 미만이거나 아예 불법적인 업장뿐이다. 후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거의 열에 아홉이 요식업일 것이다. 이력서를 넣고 사장과 면담을 보게 되면 다시 열에 아홉이 부모님과 가족에 관해 묻는다. 그나마 고상한 척을 하려는 이들은 본가는 어디냐고 돌려 말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 나이에 대학도 안 가고 알바도 아닌 전업을 뛰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암묵적인 의심의 표현이었다. 당연히도 그리 높게 살 만한 의심은 아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부의 대물림도 가난의 대물림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게 옳은지 옳지 않은지의 여부를 떠나서 실제로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로 가난의 자리에서 부의 자리를 동경하기는 해도 그 역을 상상하는 일은 많지 않다.

     세상이 오직 부 또는 가난으로 이루어진 일차원의 공간이라면 단연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감각으로 느끼고자 했던 세상은 수많은 촉감과 공간감으로 얽힌 생물학적 온기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이어받았을 부는 차갑고 고여있고 움직이지 않고 반응하지 않은 채 거대한 벽처럼 단지 버티고만 있는 죽은 무언가였다. 그 무언가 아래에 깔려 간신히 숨만 쉬던 나날들을 관통하는 내내 나는 늘 따뜻하고 흐르고 움직이고 격변하고 요동치는 피라미 같은 생명력의 가난을 동경했다. 그런 강렬한 끌림이 없었더라면 내가 그전까지 보고 배워왔던 것과는 너무나도 상이한 세상의 끄트머리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그대로 튕겨나갔을 것이다.

     어쩌면 그저 가져본 적 없는 것에 대한 철없는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욕망만으로 나는 지금껏 홀로 일곱 해를 버텼다. 지독한 고독도 과거에의 트라우마도 그 세월을 거치며 파도에 바위가 깎이듯 조금씩 갈려나갔다. 그것은 내가 괴물에서 사람으로 복귀하는 과정이었고 냉혹한 무자비함의 철옹성에서 벗어나 마땅히 타고났어야 했을 생동의 감각을 재습득하기 위한 수행이었다. 이제 나는 이십 대 후반에 다달았고 사람들 속에서 더는 외롭지 않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가난이라는 단맛의 처방으로 가학의 중독에 마비된 몸은 서서히 풀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극복이라는 말 한마디로 환원되기에는 너무도 처참하고도 숭고한 것이었다.


처음 주방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과거에 나를 사로잡았던 그 공포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날마다 출근을 하면서는 현관문에 눈에 띄지 않는 얇은 테이프를 붙여놓거나 심지어 작은 보푸라기 먼지 한 톨을 손잡이에 올려놓고 퇴근할 때마다 그것들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누군가 내가 없는 사이 내 방에 침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를 납치하려는 집단이 이 순간에도 나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피해망상은 어릴 적 살던 그 동네와는 한참 멀어진 곳에서의 물리적인 단절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매사에 경계를 풀 수 없었고 문 밖에서 들리는 자그마한 소리에도 덜덜 떨며 발소리를 죽였다. 오직 고강도 노동으로 몸이 으스러질 것만 같은 신체적인 고통만이 그런 정신적인 고통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탈출구였다. 나는 그럴수록 더 가혹하게 노동에 집착했다.

     그러나 그렇게 몸을 던진 노동 속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유년을 통틀어 만나온 사람들과는 너무도 다르게만 느껴지는 그런 사람들이. 그들은 사건 하나에 천만 원을 벌지도 입이 떡 벌어지는 학위증을 가지지도 밑줄을 쳐가며 두꺼운 논문집을 읽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맨얼굴을 내보이는 데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의아했을 내 가면의 두께에도 어떻게든 나의 알맞은 쓸모를 찾아내기만 하면 결코 그 이상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 존재가 긍정되는 경험을 차츰 쌓아나갔다. 그것은 반드시 받아들여진다거나 소속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때론 배척당하고 거부당할지언정 최소한 그 자리에서는 나라는 사람 자체가 논외로 취급되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어쨌거나 그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내게 주어진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내 역할이 있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하찮게 여겨지는 가벼운 것일지라도 나는 그 속에서 무위가 아닌 내 정체성의 무게를 적립해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설사 내 역할에 비춰 나를 무시하고 천대하고 깔보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들 앞에서조차 나는 희망만을 보았다. 그간 나는 너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상호작용이라도 내게는 그토록 소중했다. 따뜻한 웃음만이 진실이 아니었다. 때론 울음과 서러움과 아물지 않은 통증의 발화도 진실인 것이다. 가면을 벗어던질 용기를 내게끔 해주기만 한다면.

     그리고 느린 시간을 지나 풀잎이 노을에 물들듯 나는 그들 사이에서 동화되어 갔다. 때론 화창하게 웃으며 때론 먹구름처럼 포효하며. 몇 년간의 은둔 생활로 굳게 침식됐던 목소리의 물꼬를 단숨에 터뜨리듯 때론 타인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때론 타인과 함께 흙바닥에 드러누워 술주정을 뱉으며. 그렇게 사람이 되는 법을 다시 배워나갔다. 그들과 같지 않지만 누구도 완전히 같을 수 없는 당연한 세상의 당연한 일부로서 존재를 내보이기 위해서.


월세 이십만 원짜리 원룸을 구해놓고 어렵사리 직장까지 얻은 뒤 한동안 수중에 남은 돈이 거의 없어서 맵쌀 한 통을 사면서도 잔고를 확인하며 쩔쩔매던 그때의 그 차갑던 공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겨울이었고 나는 겨우 사온 그 쌀을 한 톨이라도 흘릴까 꽁꽁 언 손으로 조심스레 한 움큼을 씻어 작은 냄비에 밥을 안쳤다. 그리고 별다른 반찬도 없이 소금만 조금 뿌린 채 크게 한 술 떠서 입안에 넣으면 가득 퍼지는 따뜻한 열감과 잇몸까지 구수히 전달되는 엷은 단맛. 씹어서 삼키기를 되풀이할수록 그 단맛이 얼마나 꿀처럼 달던지 그건 지금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내게는 행복이었다. 유년의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을 만큼.

     그 불안한 갈망으로 채색된 흰 쌀밥의 맛을 나는 지금도 다른 그 무엇으로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고 감히 생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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