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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율 Nov 23. 2023

통계라는 피상

저소득층만 아동을 학대한다?

내 어머니는 약사였다. 그냥 약사도 아니고 화학과 석사에 유명 제약회사의 개발연구원 출신의 꽤 능력 있는 약사였다. 그리고 어린 나를 병원에 데려갈 때마다 늘 그 사실을 강조하곤 했다. 내가 네 살 무렵엔가 어깨뼈가 탈골돼 정형외과에 내원했을 때도 여지없이 그랬다. 그날 의사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고 한다.

     어머님이 약사라고만 안 하셨어도 아동학대로 신고했을 겁니다.

     어머니는 이 일화를 매번 무용담 꺼내듯 깔깔대며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다. 내 어깨는 물리적 충격으로 탈골되고 한 달 가까이 방치되어 이미 두 뼈 사이가 주먹 넓이만큼 벌어진 상태였다. 당연히 의사는 학대 정황을 경찰에 알릴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동종업계에 대한 예우인지 동질감인지 모를 무언가가 그 의무를 저버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그토록 당당하게 나를 대한 이유였다.

     어머니가 나로 무엇을 하건 세상은 언제나 어머니의 편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나는 꽤 오랜 시간 존경했었다. 어머니는 어쨌거나 집안의 기둥이었다. 명함만 변호사지 허구한 날 골프 치고 룸쌀롱 다니느라 생활비 한 푼 안 가져다주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는 자신이 번 돈으로 나를 먹이고 입혔다. 어머니의 번지르르한 학위증이 조제실 앞에 떡하니 걸려있던 약국은 불황기에도 늘 장사가 잘 됐다. 어머니와 같이 동업했던 다른 약사는 중학생이던 나에게 그 대학의 석사학위만 아니었어도 네 엄마랑 동업할 일은 없었을 거라고 농담조로 말하곤 했다. 당시에도 뼈 있는 농담이라고 느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머니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 정도로 잘난 학위고 커리어라는 것 아닌가. 그러니 남편이 돈을 안 벌어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잘만 살고 있는 걸 테고.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그만하면 성공한 인생일 것만 같았다.

     물론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내가 아프거나 다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머니는 항상 돈 버느라 바쁘니까 내가 통증을 좀 참으면 그만이었다.

     또 어머니는 나 때문에 돈도 못 버는 니 애비와 이혼도 못 하고 이날 이때까지 계속 사는 거라며 심심할 때마다 나를 면박주곤 했다. 내가 아버지의 나쁜 점만을 모두 빼어닮아 화딱지가 나며 니 애비가 아닌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애를 낳았다면 더 건강하고 성격 좋은 자식이 태어났을 거라는 말도 자주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하필 아버지를 그토록 닮은 게 원인이었다. 듣기에 힘들었지만 어머니도 힘들어서 그러겠거니 넘겨짚고 참으면 그만이었다.

     또 어머니는 나를 낳기 직전까지가 자신의 삶에 황금기였으며 그 이후론 단 한 번도 그와 같은 황금기를 맞지 못했다는 것으로 돌쟁이였던 나를 다른 집에 맡겨 키우게 했던 사실을 정당화했다. 당시 어머니는 페이가 센 직장 자리를 애 키우느라 포기할 수 없어 다달이 수고비를 주는 조건으로 나를 위탁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나는 까만 곰팡이가 핀 젖병에 분유를 타 먹으며 유아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그 젖병을 발견하고 몹시 분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분노는 내가 그런 환경에서 자란 데에 따른 분노가 아닌 수고비까지 줬음에도 일을 똑바로 하지 않은 고용인에 대한 분노였다.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어쨌거나 그건 그 고용인 잘못이지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라서 몸이 안 좋았던 것도 어쩌면 그런 영향들을 받아서일 수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내가 모두 참으면 그만이었다.

     참으면 그만이었다. 내 어머니니까 내가 참아야 했다. 어머니는 입도 거칠고 행동도 과격했지만 적어도 아버지처럼 골프채를 휘두르고 개를 걷어차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나도 살려면 어머니 편에 붙어야 했다. 어머니가 나를 더 싫어하도록 두면 안 된다. 어떻게든 내가 잘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내가 그 집에서 살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대학선배와 함께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다음엔 그 모임의 주선자에게 성금을 냈고 그다음엔 그 모임의 대표에게 기를 받았다. 그리고 그다음엔 기를 받기 위해 더 많은 성금을 냈고 그다음엔 그 모임에 나를 데려가 똑같이 기를 받게 했다.

     이번에도 참으려 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그건 괜찮은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야 할 그 집에 내 편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내 어린 개를 지켜줄 누군가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사회초년생 때는 또래들이 버는 평균치의 수십 배에 달하는 돈을 벌어본 적도 있고 자기 실력만으로 엘리트 세계의 높은 위치에 올라본 적도 있었다. 한미한 지방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수성가했다는 긍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를 독선과 권위의식으로 똘똘 뭉친 인간으로 만들어갔다. 때로는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맹목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사고가 날 뻔한 차량의 상대 운전자가 여성이면 저러니까 여자가 운전을 못 한다는 소릴 듣는다며 혀를 찼다. 식당에서 점원과 시비가 붙으면 그런 일이나 하는 주제에 누구한테 큰소리를 내냐고 욕설을 뱉었다. 자신도 여성이고 자신도 서비스직이며 자신도 언제건 그토록 무시당하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었지만 그의 인식체계 속에서 그는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황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는 누구도 황제가 될 수는 없었다. 단 한 곳을 빼고는.

     그곳이 어머니에게는 사이비종교였다. 현실을 배반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곳. 성금만 내면 누구나 간단하게 황제가 될 수 있는 곳. 자신이 그토록 잘났음에도 그 잘남을 완벽하게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곳.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사이비 중에는 고학력 고소득자들이 오히려 다수였다. 의사도 있고 심지어 정치인도 있었다. 모두 나름대로 똑똑하고 능력 있고 젊은 시절부터 촉망받아왔지만 사회의 교육 수준이 점차 높아지고 자신보다 더 젊고 촉망받고 능력 있고 똑똑한 후배들이 끊이지 않고 배출됨에 따라 그들과의 경쟁에서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스코어를 따내지 못한 채 서서히 염세적으로 좌절해가는 베이비붐 세대의 엘리트들. 그들이야말로 사이비교단이 원하는 신도들로 아주 적격이었다. 돈이 있고 시간이 있으되 자발적으로 사회의 안전망을 벗어났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속아넘어가도 결코 피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들. 오히려 스스로 숨기기 급급해 조금만 압박하면 더 큰 속임에도 간단히 넘어갈 사람들.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면 내가 왜 나보다 훨씬 능력 없는 의사에게 내 치부를 보여야 하냐며 펄펄 뛰면서도 자신이 믿는 교주의 말 한 마디면 싸구려 중국산 나무그릇 하나에도 백만 원 돈을 흔쾌히 지불하는 사람들. 사람들.

     그러나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사람들. 정당한 도움을 요청하는 법도 스스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인지하는 법도 배운 적 없는 경제만능 사회의 부끄러운 부산물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들이 낳았기에 그들이 보호해야 마땅했을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 속에서 탄생한 사람의 아이가.


사이비종교와 아동학대는 동전의 양면이다. 사이비종교가 있는 곳에 학대받는 아동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통계를 만드는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과 시간과 능력을 이용해서 홀로 방치되거나 폭력에 노출되는 아이들을 수치화될 수 없는 그림자로 둔갑시킨다. 그래서 오늘도 뉴스는 말한다. 아동을 학대하는 건 저소득층 가정이라고. 그들에게 적절한 일자리와 임금과 교육을 제공하면 자연스레 해결될 거라고.

     그들의 그런 노력에 힘입어 저소득층이 아닌 곳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학대 행위는 오늘도 지워지고 증발한다. 이 아이들에게는 정말로 손을 내밀 곳이 없다. 병원을 가면 의사는 가해자의 업계관계자다. 경찰서에 가면 형사는 가해자의 동조자다. 복지시설에 가면 상담사는 가해자의 신분을 보고 그의 진술을 신용한다. 도망쳐도 금방 잡힐 게 뻔하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장소가 없다. 자물쇠로 꽁꽁 봉인해놓은 감옥 같은 집 안의 내 방 한 칸만이 그나마 생존을 허락한다.

     열아홉 살 생일이 지날 때까지 사회와 나의 연결은 그렇게 완전히 끊겼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날마다 내 방 안에 누군가가 침입하는 악몽을 꾸며 침대만 덩그러니 놓인 그 좁은 공간을 지켰다. 어머니가 약국에 출근하고 없을 동안만 방문 밖을 나섰고 어머니가 돌아오면 다시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어머니는 가끔 식탁에 만 원권을 몇 장씩 올려놓은 것으로 나에 대한 양육 의무를 잊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알 수 없는 주술 같은 것을 중얼거리는 데에 썼다. 그 소리만 듣지 않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귀를 싸매고 벽에 기대앉으면 창문의 유리를 뚫고 발꿈치에 닿는 가로등 빛.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 줘. 날마다 목구멍 안쪽으로 울부짖었다.

     열아홉 살이 되고 보름 만에 나는 어머니가 옛날에 내 명의로 만들어놓은 통장 하나만 들고 내 작은 개와 함께 집을 떠났다. 통장에 든 돈은 오십만 원이었다.


나는 이제 그림자 밖으로 건너왔지만 여전히 십 대 끝자락의 통증에서 다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세상은 지켜지지 않는 아이들에게 혼탁한 미래만을 투영하고 그 탁류에 휩쓸려 삶을 등지는 꽃잎들은 오늘도 어제와 같이 떨어지고 있다. 오직 그 집에서 나오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십 대의 시간들을 모두 바친 나는 그 십 년의 시간 내내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내 개가 죽은 후 이십 대가 되어 뒤늦게 두 번의 자살시도를 했다. 그러나 그런 버팀목조차 없었던 적지 않은 수의 어린 사람들이 때론 한 번의 시도만으로도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안다. 그 죽음들에 대한 소식은 사회부적응이라는 딱지를 얹고서 신문 끄트머리에 짤막하게 실릴 뿐이었다. 그리고 바쁜 사회 속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따라서 나는 지금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 글을 쓴다. 피지도 않은 꽃망울에 진흙을 퍼붓고 질식을 유도하는 모든 사람 아닌 자들에게 고한다. 우리는 결코 당신들이 벌떼처럼 달려든 그 길로는 가지 않을 거라고. 사람으로 살기 위해 당신들이 억지로 드리운 것을 드러내고 빛을 갈망할 거라고.

     특출 나지도 잘나지도 않았지만 타인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길로 우리는 나아갈 것이다. 단지 평범한 사람으로 세상에 서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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