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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율 Jan 29. 2024

겨울에 멈춰 선 은빛 자작나무 숲

꿈에도 그리지 못할 꿈의 해석

‘어떤 꿈에서 나는 날고 있었다. ……날아오르는 기분은 굉장히 신났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찔한 높이로까지 치솟고 있었기에 이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나는 숨을 참거나 내쉬는 것으로 상승과 하강을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면서 살아날 수 있었다(헤르멘 헤세, 데미안 中).’


피스토리우스는 그 꿈에서 싱클레어가 깨우친 힘을 수천 년 전에 원시종 물고기들이 균형을 잡기 위해 사용했던 부레와 동일한 것으로 설명했다. 비유로서 빗대는 게 아니라 아예 부레 그 자체라고 못 박아버린다. 그것은 심연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기 위한 싱클레어만의 의지이자 생명이 진화하며 발현된 신체능력과도 절대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그 해석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고 그를 받아들인다. 피스토리우스를 감히 신과도 범접하는 현자라고 믿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궁금증과 호기심의 프리즘으로 모든 것을 투영하는 젊은이의 풋내 나는 자의식의 연장이었을까. 하지만 어느 쪽이건 그 꿈의 해석은 싱클레어가 자신의 알을 부수고 세상에 나서기 위한 투쟁이다. 그리고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한 번 넓은 차원을 맛본 생각은 결코 그 이전의 차원으로는 되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물고기의 부레와 같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려나 나 역시도 내가 날고 있는 꿈에 자주 빠져들곤 한다. 현실에서와는 달리 꿈에서는 날아오르기 위한 아무런 준비의 과정도 없이 갑자기 내 자아가 스스로 이미 비행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이채로운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꿈이 몇 번인가 반복되어 그 이채로움에 편안하리만치 익숙해지고 나면 언제부턴가 날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직후부터 이것이 꿈임을 동시에 인지할 수 있게 된다. 흔히 자각몽이라고 일컬어지는 이것은 아예 이를 완전한 의식의 지배 하에 두기 위한 탐구와 분석의 기록들까지 존재할 정도로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이어져온 인류 역사의 공공연한 유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엔 꿈의 공간 안에서 자유자재로 비행술을 펼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자유의지를 관철할 수 있게 되고서조차 이를 오롯이 장악하려는 시도나 노력은 일절 기울이고 싶지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꿈이란 실존의 감각과 의식체계로 장악되지 않는다는 데에 그 존재의 의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식을 거스른다면 그것은 여전히 꿈이라고 불릴 수는 있겠지만 더는 현실을 보완하는 기능에 만족하지 않고 서서히 반대편의 세계까지 침범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간파했던 것 같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마땅함의 문제였다. 순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설령 고대종의 물고기의 부레가 물에 잠기지 않고도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 굳이 그를 갈망할 필요는 없는 것과 비슷하다. 단지 오늘날의 물고기는 물 밖에서는 숨을 쉬지 않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쨌거나 비행의 꿈을 꾸는 것은 퍽 즐거운 경험이다. 나는 그 공간에서 날아오르는 내 몸을 단순히 조종하는 걸 넘어서 어떤 순간에라도 단지 그를 의식하는 것만으로 현실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는 무의식의 윤곽이 자연스레 사그라지는 때까지 간섭하지 않은 채 그저 주어진 시간을 만끽했다. 아주 높이 치솟은 고공에서 당장이라도 낙하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일면 곧장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서 더 높이 솟구치라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면 그 공간은 즉시 확장돼서 더 넓은 세계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그렇게 도심의 빌딩숲 너머로 별들과 진공이 펼쳐지는 은하까지 순식간에 도약하면 그것이 꿈의 환각에 불과함을 잘 알면서도 그 자각을 아득히 넘어서는 진솔한 황홀경에 휩싸이게 된다. 세상이 너무 쉽게 넓어져서 오히려 더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중력으로부터의 두려움과는 확연히 다르다. 중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에서도 못지않게 접했기에 그만큼 나약하게 느껴지지만 지나치게 거대해진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오직 꿈에서만 느껴지는 감정이다. 어린 아이일 적에 천문대에서 빨갛고 파란 안경을 쓰고 영화관 의자에 파묻혀 감상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우주 그 자체의 향연이었다.

     나는 내가 지금 싱클레어의 부레와 나의 우주가 동일한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부레는 싱클레어가 힘을 표출하는 도구이자 몸의 일부지만 내가 과한 빛과 과한 어둠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하는 이 우주는 나를 도구로 삼으므로 곧 내가 그의 일부인 것이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그물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부레가 그 물고기의 처지에서 물을 대하는 수단이라면 우주는 물에 내려진 닻의 처지에서 그물을 대하는 수단이다. 요컨대 그물을 버려도 우주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주는 닻이 존재하는 한 언제라도 새 그물을 짜면 그뿐이다. 그 그물에 새로운 물고기가 잡힐 것인가와는 별개로.

     이 사실은 나에겐 단순한 비행술의 습득 그 이상의 위안이 되어준다. 나에겐 이미 꿈속에서 만나고 잃어버린 수많은 공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엄청나게 높다란 서가가 있는 지하 문방구. 그리고 문방구의 구석 한켠에는 반드시 좁은 철장에 갇힌 갈색 푸들이 보이고 나는 반드시 지하로 들어서자마자 그를 먼저 마주한다. 푸들은 나이가 많고 병이 조금 들어서 홀로 그 철장을 지키는 것 같다. 어리고 키가 작은 나는 한편으로는 어서 빨리 문방구의 서가들을 속속들이 구경하며 사고 싶은 책과 필기류를 한아름 안고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 나이 든 강아지가 언제쯤 좋은 주인을 만나 이곳을 벗어나게 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즈음 나는 이 공간이 꿈임을 알아차린다. 그래도 내 자의로 나갈 수는 없다. 매번 이 공간의 꿈을 꿀 때마다 만나게 되는 이 푸들이 그렇듯 나도 이곳에 갇힌 운명인 것이다. 그래도 나는 묘하게 그것이 원망스럽지는 않다. 다만 앞으로 내가 정해진 수순에 따라 열심히 고를 책들과 필기류들을 현실로 데리고 나갈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강아지는 어차피 현실이래도 키우지 못할 것이므로 외려 꿈이기에 죄책감이 더 덜어지는 요소로 격상된다. 이것이 이 공간에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안도감이다.

     그리고 또다른 공간으로는 이런 것도 있다. 어딘가 미로 같은 방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 그리고 그 방들 중 하나에서 아주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것마냥 몹시도 친근한 분위기의 영화 한 편이 상영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는 것도 같고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 것도 같다. 나는 여기서 강한 데자뷔를 한 차례 느낀다. 이게 꿈인 것 같다고 어렴풋이 인지는 하고 있지만 이 데자뷔가 온전히 꿈에서의 것인지 현실에도 이와 흡사한 것을 느낀 적이 있는지가 여전히 혼동된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을 발견하고 연거푸 데자뷔가 발동된다. 그 사람은 지금 상영하고 있는 영화의 주인공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하지만 영화의 어떤 장면을 보고 쑥스러운 듯 웃는 걸 보니 역시 주인공이 틀림없는 모양이다. 웃을 때 옆모습이 특히 비슷하다. 나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침작한 어조로 말을 건다. 그 사람도 침착하게 대답을 이어간다. 역시 우리는 잘 아는 사이 같다. 적어도 오늘 처음 본 사이는 아니다.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이 영화의 제목을 정확하게 떠올리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분명히 이미 제목을 알고 있었다. 그건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꿈에서일까 현실에서일까. 이 꿈에서 깨기 전에 이름을 떠올린 적이 한 번이라도 있긴 한가. 이것과 똑같은 꿈을 꾸는 게 대체 몇 번째인지도 알 수 없는데 말이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그 푸들이나 그 배우 그리고 그 서가와 그 영화를 현실에서 만난 적이 없다. 그리고 이 두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들에서 발견한 다른 수많은 것들 또한 단지 꿈속의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자주 그리고 되풀이해 만나보았다. 매번 연극 속의 배역인 듯 틀에 박힌 일정한 상황만이 펼쳐지고 모든 물체가 흐지부지되며 깨어난다는 그 뻔한 결말로부터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을 더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받아들인 순간부터 내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그 모두를 꽤나 그리워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들이 사라지며 남긴 선물이 바로 비행과 우주였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을 조종하는 비행은 상황이 아닌 능동적인 실행이기에 꿈이 끝나도 사라질 수 없고 찰나나마 나를 소속되게 했던 그 우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마음껏 날아오를 때만큼은 가득 차올랐던 그리움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태양을 향해 다가가는 이카루스의 깃털처럼 나의 그리움은 차례로 조각조각 녹아내렸다. 그러나 이 비행은 내가 의지를 관철하는 한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기에 나는 날개 없이도 태양보다 더 멀리 솟구쳐 순수한 어둠을 향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잃어버린 꿈의 공간을 한 곳만 더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이 꿈속에서 나는 기차에 타고 있다. 기차에는 내 어린 시절 친구들이 마구잡이로 함께 타고 있는 것도 같지만 그들이 각각 누구인지 세세하게 떠올려지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지금 내 관심사는 친구들보다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머무르고 있다. 몸통이 긴 기차가 직선으로 이어진 철로를 따라 빠르게 달리는 동안 내 눈길은 끝이 나지 않을 듯 아스라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에 고정될 뿐이다. 나는 그 숲길을 바라보며 내 어린 강아지 파이를 생각한다. 여기에 파이랑 같이 오면 참 좋겠다. 파이도 숲을 정말로 좋아하는데. 오늘은 기차역을 그냥 지나치지만 다음엔 파이랑 단 둘이 와서 이 기차역에 내려야지. 그리고 자작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스치며 치칠 때까지 같이 걸을 거야. 파이가 얼마나 좋아할까. 행복한 산책이 되겠다.

     그러다 문득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아니 파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둘 중에 무엇이 먼저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꿈이고 파이가 이미 죽은 건 진실이다. 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꿈을 꾼다고 해서 내가 어려지는 것이 아니듯이. 잠시 파이가 살아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꿈 속에 들어왔다고 해서 파이가 죽지 않은 것은 아니다. 파이는 죽었다. 어린 강아지로 나에게 와서 늙은 강아지로 나를 떠난 그 아이는 나와 함께 이 자작나무 숲에 와본 적이 없다.

     이 모두는 진실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진실이다. 적어도 자작나무 숲을 보며 그 아이를 그리워하는 이 마음만은 진실이다. 애통함과 나직이 오열하는 심정만은 진실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고 여기며 언젠가 다음에 이 숲길을 나란히 걷길 바란 그 희망만은. 기필코 진실이다. 그래서 이 숲에 소복이 쌓여 은빛으로 빛나는 눈이 영원히 녹아내리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선로 위의 기차에서 내려 크나큰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끝이 나지 않을 듯 되풀이되고 되감아지던 수직의 빗금에서 벗어나 수평과 지평 너머의 울타리를 통증 어린 구심점으로의 낙하로부터 탈출시킨다. 기차의 탈선. 다 녹아서 해진 깃털. 하지만 여전히 날고 있고 숨을 쉬고 있다. 나는 마침내 이것이 나의 진짜 꿈임을 깨우친다. 마침내. 숲처럼 빼곡히 우거진 기억의 소용돌이를 부수고 칠흑의 어둠을 구출하러 가는 것이다.

     탈주. 그러나 알을 부수고 나선 새는 살아났기에 가야 할 곳이 있다. 그곳은 뒤집어진 세계처럼 꿈인 동시에 꿈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쪽도 감히 침범하지 않은 채로 오랜 그리움은 다시금 시작될 것이다. 내게 균형 잡기의 법칙을 알려준 그 은빛 자작나무 숲의 찬란함이 사라진 뒤에도 그로부터 배운 순리의 결론은 지켜질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이제 비행의 꿈을 꾸지 않은 날에도 때때로 그 우주를 머릿속에 그리며 고른 숨을 되찾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꽤나 명료한 일이다. 굳게 닫힌 서랍의 뒷면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음이 명료하듯이. 그리고 기차는 언젠가 돌고 돌아 다시 우주의 궤도를 돌 것임이 명료하듯이. 고로 이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대하는 어느 깃털 없는 새의 일가견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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