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율 단편소설
낮달과 바람개비.
잠자리의 그림자.
핑그르르. 이명이 스친다.
계절을 지나는 지나침의 잔상.
시간을 게을리 보낸 적은 없다. 다만 세상을 붙잡는 일에는 게을렀던 것도 같다.
독한 술을 마시면 단숨에 숨이 불타는 것 같아서 좋다. 타닥타닥 숨의 심지에 숨결이 붙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무언가를 붙잡는 일에는 다시 게을러지고야 마는 것도 같다. 그래도 괜찮다.
내일은 그래도 온다.
나는 걷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전에도 존재하던 것들이다. 혹은 이전에도 존재하던 것들보다 못났다. 혹은 잘났더라도 덜 결백하다. 하얗지 못하고 때가 묻었다.
그런데도 여기에 무언가를 더 덧씌울 필요가 있을까. 나는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어쩌면 더 필요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쓰지 않고 걷는다. 쓰고 싶어서 걷는다.
지난 겨울에 짓이겨진 마음과 맞바꾸어 사왔던 공책은 오늘도 공란이다. 텅 비었다.
암전. 놀랍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그렇게 믿어버려야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 종이 한 장의 차이.
생과 사의 갈림길.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암전.
하고 싶은 일로 돈을 벌 수는 없기에 할 수 있는 일로 하루하루를 때운다. 일을 한 만큼의 돈을 번다. 여기에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렇게 빚을 졌다.
하지만 이렇게만 살고 싶지는 않았던 것도 같다. 나는 다시 걷는다. 내 살을 베어물 듯이 담뱃불이 입술에 물린다.
그리고 암전.
무언가가 심상치 않다. 혹은 심상치 않음을 필요로 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손톱만 한 진실과 무뢰배 같은 겉치레.
어쩌면 날마다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지난한 기다림의 끝에서 날마다 암전이 일어난다. 심상치 않음에 확신이 저며든다. 멀리서 마음이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암전. 모든 것이 순리를 따라서 이루어진다.
앞으로도 뒤로도 향하지 않고 단지 사라진다.
나는 걷는다. 시끄러운 인간의 역사를 되짚으며 걷는다. 혹은 그로부터 배어나온 세치혀의 역설을 되짚으며 걷는다.
그러나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선. 선은 재능이다. 선이라는 재능보다 우선하는 재능은 없다. 신의 권능이 없는 세상이라면.
그러나 알고 있어. 신에게조차 권능은 없어. 그리고 재능은 간신히 마음을 내어주고서 이내 재가 되었다.
나는 실재하는 삶을 지키기 위해서 선을 너무 많이 잃었다. 신이 사라진 모퉁이에서 사력을 다하는 휘발성. 들숨과 날숨의 소멸.
핑그르르. 이명은 그것조차 집어삼킨다. 파르르. 가랑비에 손을 씻는 타는 목마름.
암전이 암전에 암전을 거듭하면 빛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한 가지가 아닐지도 모르겠네.
한 켤레의.
빛.
내가 찾고 있는 것.
하얀 벽에 머리를 박고 죽는 상상을 밥 먹듯이 했다. 일고여덟 살 정도를 먹은 작은 아이였다. 살아 움직이는 듯이 생생한 그림에 세차게 날아들어 그대로 피를 흘리며 죽는 작은 새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 새들과 같이 벽 너머의 세상이 실재라고 믿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과 같이 사라질 수 있음을 믿었다. 그 하얗고 하얀 공백을 사랑하고 싶었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다고 갈망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기억이 되었다. 피를 흘리지는 않았으나 상상을 가득 채운 하얀 벽은 쉽게 붉어졌다. 그렇게 물들고야 마는 그것이 곧 갈망이었다.
언어가 다른 것보다 억양이 다른 것이 더 곤혹스럽고 잔인하다는 것을 나는 그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배웠다. 불가해한 것보다도 이해할 수 있음으로 인하여 삭막해지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인간들의 아우성. 소리. 가장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닳지도 닿지도 않는 닮음. 그래서 만들다가 만 낱말들은 증오의 씨실과 엮여 순간의 기억을 관통한다. 그리고 어떤 자상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삭아들지 않는다. 뜻 모를 그림자만이 정체하는 숲. 울타리는 때가 탄 벽만큼이나 조악하다.
환기. 그러나 불어오는 곳에서조차도 굳게 고여 있다. 오로지 공백의 가장자리만을 풍화시키는 침투.
외조부는 그 집에서 나에게 웃어주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내 유년에 나에게 웃어주었던 유일한 어른은 그였다. 외조부는 어려서 죽은 자식을 잊지 못해서 술을 마셨고 중풍을 앓았고 치매에 걸렸다. 외조부가 나에게 웃어준 것은 단지 그가 잊었기 때문이었다. 증오를 잊었고 소리와 아우성을 잊었고 삭막하게 이해된 부조리와 학살과 울분과 그들과는 다른 나의 억양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것을 잊지 않았더라면 그도 다른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단 한 번의 웃음도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웃음과 같이 재능마저 더 재빨리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서늘하도록 햇볕을 닮아 있던 주름의 그늘의 파장을 잊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일그러지던 밭은 숨결. 들숨과 날숨.
치매라는 병. 그리고 젊음과 목숨과 시간의 그림자를 서서히 잃어가는 일을 동경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쩌면 사무치는 연모였다.
외조부의 웃음은 어쩌면 외조부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잉태된 것이었다. 고작 반백 년조차 되지 않은 같잖은 역사의 슬픈 인식의 증오가 어떻게 감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어도 감히 한 뼘이라고 일컬을 수조차 없을 만큼 작고 작았던 아이에게 그것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바람이었다.
그 어머니들도 그와 같이 사라졌을까.
적막강산에 나는 있었는가.
담뱃불이 입술에 물린다. 파르르르. 연기가 가슴을 턱 막히게 한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분노로 잠식된 안광의 살기마저 느긋하게 타다 죽는 계절. 못내나마 한때가 절박한 것은 잃어가는 인간뿐이다.
그러나 담배가 공상의 횃불과 같이 따뜻한 것을 처음 안 것은 언제였더라.
그리고 암전.
나는 발을 끌며 걷는다. 인명이 천명인 것. 나의 외조부의 첫 자식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 혹은 그의 괴로움으로부터 잉태된 망각과 타들어간 잿빛의 파편들을 떠올리며. 나는 걷는다. 그러나 뒤로 무르지는 않는다. 단 한 가지도.
반백 년조차 되지 않는 역사를 위해서 죽어간 시인의 시를 생각한다. 시인의 말년에 쓰인 시는 모조리 불태워졌다. 그것이 시인의 유언이었다. 수백 장 혹은 수천 장에 이르는 유구한 언어와 그 문맥 사이사이에 들어찬 소리들이 순식간에 한 줌으로 요약되었다. 환치. 시인은 단지 고향의 억양으로 말을 건네고 싶었을 것이다. 역사가 아니어도 좋을 기억들이 있기에 바쳐졌던 헌시.
그리고 반만 년을 거슬러 오르는 기록들에도 유언으로써 자신의 현신을 불태운 인간들이 있었다. 글의 운명도 그들에게는 천명이었다. 그런데도 발자취가 지워졌다고 해서 눈길을 거둘 셈인가.
그것은 선이 아니다. 그것은 선이 아니다.
암전.
환원. 굴복한 것이 아니다.
돌고 돌아도 사람을 깨달을 수는 없어. 사람은 깨닫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거니까. 분명 누구에게나. 다만 너무도 큰 편차로.
신에게서조차 구원을 얻어내지 못한 시들이 자욱한 슬픔을 딛고 흘리는 눈물로 마침내 흐르는 마음. 낮달에 비치는 바람개비는 모퉁이의 소금기를 들썩인다.
암전과 암전과 암전과 암전과 암전. 그리고 나는 신발끈을 묶는 방법조차 잃어버렸다. 그리고 잃어버린 조각을 엮는 방법조차. 나는.
맨발을 끌며. 언젠가 보았던 웃음을 나는 닮았노라.
독한 술을 마시면 잃은 것을 잊을 것만 같아서 좋다. 한 잔에 가득 휘발성을 위한 건배. 거울 속의 나는 젊음의 탈각으로 주름을 뒤집어쓴다.
들이켜는 것은 오로지 회환만을 정체하려는 진심. 거짓을 섞지 않고자 망각의 망각은 희석되었다.
이명이 들린다. 들어 봐. 그리고 먼 곳의 하늘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
나는 죽는 게 아니야.
죽으려는 게 아니야.
사라지는 것도 아니야.
그저 나를.
나의 기억을.
한 잔에.
한 명씩만.
기억할 뿐.
나는 아직도 잊지 않은 것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