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니체까지
나는 음악을 표현이라기보다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떤 상태를 만들어내느냐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이 생각은 새롭지 않다.
오히려 오래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음악은 단순한 쾌락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이 감정을 형성하고, 그 감정이 습관이 되며,
습관이 인간의 행위를 만든다고 보았다.
즉 음악은 아름다움 이전에 윤리적 기능을 가진 기술이었다.
음악은 인간을 특정한 상태로 이끌고, 그 상태가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까지가 음악이 기능을 가질 수 있다는 가장 오래된 근거다.
하지만 기능이 곧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지점에서 칸트가 필요해진다.
칸트는 미적 판단은 강제될 수 없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이것이 옳다”고 미적으로 설득하는 순간,
그건 이미 도덕 명령이 된다.
그래서 음악은 결론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음악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판단을 유예시키는 것이다.
음악은 “이렇게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이 발생할 수 있는 공간을 잠시 열어둘 뿐이다.
그래서 나는 설명을 앞에 두지 않는다.
메시지를 먼저 꺼내지 않는다.
음악이 먼저이고, 말은 그 다음이다.
이 방식은 타인의 이성을 침범하지 않는다.
칸트적인 의미에서 가장 최소한의 개입이다.
그리고 니체에 이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묶인다.
니체에게 음악은 개념 이전의 힘이다.
음악은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음악은 세계가 견뎌질 수 있게 만든다.
음악은 의미를 전달하기 전에 인간의 상태를 바꾼다.
논리는 설득하지만, 음악은 먼저 열어젖힌다.
그래서 음악은 주장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주장을 감당할 수 있는 몸과 감각을 만든다.
내가 말하는 음악의 기능화는 이 세 지점 위에 서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음악은 인간의 상태를 형성하고,
칸트적으로 그 형성은 강요가 아니며,
니체적으로 그 모든 것은 의미 이전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노래 자체는 설득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선언을 앞세우지도 않는다.
다만 음악으로 먼저 사람을 멈춰 세운다.
집중을 만들고, 몸을 열고,
그 다음에야 말이 들어올 자리를 남긴다.
음악은 결론이 아니다.
음악은 입구다.
나는 지금 그 입구를 이 시대 한가운데에 놓아두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