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과 신앙 사이에서 시작된 분열
국민학교 시절 IQ 테스트에서 나는 138을 받았다.
선생님들은 놀랐고, 나는 그 반응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숫자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주지 못했다. 그저 또 하나의 통과 지점이었다.
아버지의 직업 특성상 우리는 거의 매년 이사를 했다.
국민학교에서만 전학을 다섯 번 했고, 중학교에서도 두 번을 옮겼다.
그만큼 관계는 남지 않았다.
친한 친구를 사귀는 일은 어려웠고, 나는 점점 혼자 생각하는 아이가 되었다.
잘 어울리지 못했다기보다는, 굳이 어울릴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표현이라기보다는 배출에 가까웠다.
중학생 시절 미술부에서 활동하며 지도 교사는 내게 말했다.
너는 미술을 해야 한다고. 지금 네가 어느 수준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지만,
이미 대학생 수준이라고.
그 말은 나를 부풀게 하기보다 오히려 확정시켰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예술고등학교를 가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보수적인 가치관 속에서 예술은 직업이 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로 갔다.
첫 미술 시간,
아그리파 데생을 했고 수업이 끝나자 미술 선생님은 바로 미술부 입부를 제안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다시 부모님께 말했다.
답은 같았다. 단칼에 거부였다.
그 과정에서 내 그림은 찢겼다.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부모님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라는 존재가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신앙은 더 이상 보호막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믿음의 의미는 점점 의문으로 변해갔다.
기도는 형식만 남았고, 내용은 바뀌었다.
일기장에는 죽음을 갈망하는 문장들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고, 점점 노골적이 되었다.
그것은 관심을 끌기 위한 언어가 아니었다.
나 스스로에게만 남기는 기록이었다.
이 시기가 내 사춘기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버텨야 하는 쪽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인식은, 이후의 삶을 끝까지 따라왔다.
여담으로 전 대학생이 되고 멘사테스트에 도전했었는데 결과는 168로 93년 멘사 회원이 되었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