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화낸 거 아니야

화를 화라고 말하지 못하는 우리의 자화상

by 박온유

김장터

오늘 회사 식당은 김장터가 아니라 전쟁터였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 불길은 옆 사람에게, 또 그 옆 사람에게 옮겨 붙었다. 마치 마른 장작에 불이 번지듯, 아니면 건강한 세포를 잠식하는 암세포처럼,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이 '화(火)의 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경상도 사람들의 대화가 싸움처럼 들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이것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기 자체가 달랐다. 붉은 양념보다 더 시뻘건 감정들이 허공에서 부딪치고 터졌다. 그들은 서로의 말을 꼬투리 잡고, 방어하고, 공격하며 악을 썼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언제, 누구를 향해 터질지 모르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았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얼마나 '화'로 가득 찬 구성원들로 채워져 있는지, 그 압축된 증거를 보는 듯했다.


비겁한 수습과 반복되는 기만

그런데 정말 기이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한바탕 고성을 지르며 감정을 배설한 그들이, 갑자기 이성을 찾은 척하며 '수습'을 시도하는 것이다. 잠시 후 밥은 같이 먹어야 하니까, 내일도 얼굴을 봐야 하니까. 그래서 그들은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까 내가 큰 소리 낸 건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다. 내 말투가 원래 그렇다." "나도 대들려고 그런 게 아니다. 오해하지 마라."

방금까지 으르렁대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이성적인 직장인'의 가면을 쓴다. 그러다 또 다른 대화가 오가면, 이번에는 "방금 그 말에는 내가 진짜 화가 났다"며 정색을 한다. 화를 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다시 화를 내는 이 무한한 자기기만의 반복.

그들은 자신의 감정조차 통제하지 못하면서, 그 책임을 '상황'이나 '상대방'에게 돌리며 비겁하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김장터의 그 아수라장은, 개인의 인격 문제가 아니라 병든 사회가 만들어낸 집단 발작이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가면을 썼을까?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솔직하지 못한 존재가 되었을까? 기억을 더듬어보자. 5살 아이는 그렇지 않다. 아이는 친구가 장난감을 뺏어가면 즉시 얼굴을 찌푸리며 "나 화났어! 내 거야!"라고 소리친다.

기쁨(喜), 분노(怒), 슬픔(哀), 즐거움(樂). 이 네 가지 감정은 아이에게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생존 본능이다. 아이는 화를 냄으로써 자신을 지키고, 화를 발산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해맑게 웃는다. 감정에 찌꺼기가 남지 않는 것이다.

비극은 우리가 '학교'라는 작은 사회와 '조직'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착한 어린이는 화내지 않아요." "형이니까, 신입이니까, 분위기 망치지 말고 참아야지."

우리는 성장하는 내내 '감정을 드러내는 건 미성숙한 것'이고 '참는 것이 어른스러운 것'이라는 왜곡된 생존 법칙을 주입받는다. 경쟁 사회에서 감정의 노출은 곧 약점이 되기에, 어른이 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는 기술을 가장 먼저 익혔다. 우리는 그렇게 괴물이 되어왔다.


우리는 모두 '홧병' 환자다

왜 우리는 이토록 화에 솔직하지 못할까? 왜 화를 내놓고도 "화낸 게 아니다"라고 부정해야만 안심할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억압된 화(鬱火)'를 품고 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산다는 건,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시스템에 복종하는 훈련을 평생 받는 것과 같다.

유년 시절의 솔직함은 거세당했고,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병든 윤리를 내면화했다.

그 결과, 우리는 감정의 변비에 걸려버렸다. 제때 배출하지 못한 화는 내면에 쌓여 독(毒)이 되었다.

의학적으로 '홧병'이라 불리는 이 증상은, 억울하고 분한데 말은 못 하고 끙끙 앓다가, 결국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방식으로 터져 나오는 병리적 현상이다. 흥미로운 건, 이것이 미국 정신의학회에도 한국어 발음 그대로 등록될 만큼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문화 고유의 질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김장터의 그 아수라장은, 단순한 개인의 인격 문제가 아니라 '참는 것이 미덕'이라며 감정을 억압해 온 한국 사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특유의 집단 발작이었다.


이 기만극의 하이라이트는 병원에서 펼쳐진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날부턴가 소화가 되지 않았다. 한 달이 넘도록 아무리 소화제를 털어 넣어도 명치의 더부룩함과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결국 한방병원이나 가보자 하고 찾아간 그곳에서 의사는 대뜸 진단을 내렸다. "환자분, 이건 홧병입니다."

의사의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왔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네? 홧병이요? 우리가 그냥 내뱉는 그 홧병이라구요?"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약을 지어 나왔다. 돌이켜보면 웃지 못할 촌극이었다.

몸은 이미 독(毒)이 된 화를 견디다 못해 "나 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는데, 정작 그 몸의 주인인 내 머리는 "내가 홧병이라니, 말도 안 돼"라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다. 홧병은 이미 말했듯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문화 고유의 질병'이다. 이 병의 가장 무서운 증상은 가슴 통증이 아니라,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자기기만'이다. 우리는 그렇게 '화'를 잃어버렸다.

아니, '내가 아프다'라고 말할 자격조차 스스로 박탈해 버렸다.


화를 화라 부르지 못하는 폭력

문제는 이 '발작'은 명백한 폭력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배설물을 쏟아내고는 "이건 배설물이 아니라 거름이다"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 "원래 내 목소리가 크다"는 변명은 듣는 사람의 인지 능력을 파괴하는 가스라이팅이다.

화를 듣는 사람은 분명 공포와 모멸감을 느끼는데, 가해자가 "이건 화가 아니다"라고 규정해 버리면, 피해자는 자신의 고통을 의심해야 한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2차 가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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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정직함으로 돌아가라

우리는 이제 이 지독한 연극을 멈춰야 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오아시스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 했던가. 우리 내면의 황무지에도 아직 유년의 순수함이라는 오아시스가 남아 있다. 아이는 화가 나면 "나 화났어!"라고 외친다. 그 외침은 존재의 가장 정직한 선언이다.

화를 화라고 인정하자. "나는 지금 화가 났다." 이 짧은 문장을 뱉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화를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화가 어디서 왔는지 직시할 수 있다. 그것이 저 사람의 무례함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옥죄는 시스템의 불합리 때문인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비겁한 변명 뒤에 숨지 말고,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하지 말자.

내가 낸 것은 화가 맞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는 폭탄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책임지는 윤리적인 인간으로 다시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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