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게 사는 법

내가 동의 할 수 없는 건강 법

by 박온유

아픈 사람을 정리하라는 조언 앞에서, 나는 끝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건강하게 사는 법을 이야기할 때 종종 비슷한 말을 한다.
건강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라는 말이다.
주변에 아픈 사람이 많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과 관계를 점검해야 할 신호라는 조언이다.
이 말은 관리와 성숙의 언어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끝까지 밀어붙여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안에서 하나의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건강한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라는 말은 아픈 사람을 덜 만나라는 말을

도덕적으로 안전하게 말하는 방법일 뿐이다.


그렇다면 아픈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추상적이지 않다.
나는 오랫동안 아픈 사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정신과 진료를 수십 년간 받아왔고, 신경계 질환 역시 긴 시간 내 몸의 일부였다.
두통은 며칠씩 이어지곤 했고, 때로는 의식을 잃기도 했다.
몸의 일부가 마비되는 순간들도 있었다.
이것은 일시적인 컨디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조건에 가까웠다.


아픔은 예고하지 않는다.
그리고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종종 아픔을 관리 실패의 결과처럼 말한다.
아픈 사람 곁에 오래 머무는 선택은 자기 삶을 방치하는 일처럼 취급된다.

나는 이 논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논리는 건강을 덕목으로, 아픔을 결함으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아픈 사람을 정리하라”는 조언은 인간을 관계적 존재가 아니라 기능적 존재로 환원한다.
건강함은 생산성과 안정성을 의미하고,

아픔은 효율을 떨어뜨리는 변수로 분류된다.
이 기준에서 인간은 더 이상 함께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위험을 관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역사에는 이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국가가 있었다.

그 이름은 지금도 강함의 상징처럼 사용된다.


"스파르타"


스파르타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처음부터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었다.
강한가, 버틸 수 있는가, 공동체에 즉각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생명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픈 아이, 약한 아이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변수로 간주되었고,
관계의 품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정리되었다.


이 선택은 잔혹함 이전에 철저히 합리적이었다.
스파르타는 감정이 아니라 효율로 국가를 설계했고, 인간을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전투 자원으로 이해했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강해졌고, 오래도록 두려움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러나 동시에, 스파르타는 사라졌다.

철학적으로 중요한 지점은 여기다.
스파르타가 실패한 이유는 외부의 침략 때문만이 아니다.
그 사회는 약자를 제거함으로써 단기적인 안정과 힘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관계의 확장성과

회복 능력을 스스로 잘라냈다.


아픈 사람을 제거하는 사회는 처음에는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그 사회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아직 약해질 가능성’만으로도 관리 대상,

위험 요소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누구도 안전하지 않은 사회가 된다.

오늘날 “아픈 사람을 정리하라”는 조언은 스파르타만큼 노골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논리의 방향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건강함은 생산성과 안정성으로 환산되고, 아픔은 공동체의 리스크로 계산된다.
관계는 윤리가 아니라 위험 관리의 문제가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건강한 사회’는 스파르타의 논리를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가.

강함을 숭배하는 사회는 언제나 약함을 숨기거나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강함으로만 구성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언제든 아플 수 있는 존재이고, 그 취약성 위에서만 관계와 윤리,

그리고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스파르타는 강함의 상징으로 남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모델로는 남지 못했다.
지금도 "스파르타 식" 이라는 비유 자체가 우리가 여전히 같은 유혹 앞에

서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은 언제나 취약했고, 그 취약성 속에서 관계를 맺어왔다.
아렌트가 말했듯 인간의 존엄은 완결성이나 정상성에 있지 않다.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말하고, 선택하고,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존재다.

아픈 사람을 관계에서 배제하라는 조언은 이 인간 이해를 뒤집는다.
아픔은 더 이상 공유되어야 할 조건이 아니라, 관계의 자격을 박탈하는 사유가 된다.

나는 이 세계관에 동의할 수 없다.


신학적으로 보면 이 문제는 더 분명해진다.
기독교 전통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건강한 존재로 등장하지 않는다.
성서의 중심에는 늘 상처 입은 인간이 있다.
병든 몸, 흔들리는 정신, 사회에서 밀려난 존재들.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은 회복된 이후에 관계를 허락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는 아픈 상태 그대로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 접촉은 치료 이전에 먼저 관계였다.
복음은 언제나 “건강해지면 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그대로 오라”고 말했다.


“건강한 사람들과만 관계 맺어라”라는 조언은 이 복음의 방향과 정반대에 서 있다.
이 말은 조건부 관계를 정상으로 만들고, 존재의 가치를 상태에 종속시킨다.

나는 그 조건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반문한다.
“그러다 네가 망가지면 어쩔 거냐”고.
이 질문은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 질문은 중요한 전제를 숨기고 있다.

아픈 사람을 외면하면, 나는 정말 더 건강해지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픈 사람을 정리하는 선택은 몸을 보호할 수는 있어도,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점점 무디게 만든다.

아픔을 감지하지 않는 연습은 타인의 고통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균열에도 둔감해지게 한다.
그렇게 얻은 건강은 온전한 삶이라기보다 위험을 최소화한 생존에 가깝다.

나는 그런 건강을 목표로 삼고 싶지 않다.


내가 아픈 사람들에게 눈이 가는 것은 선택이라기보다 반응에 가깝다.
나는 그것을 고쳐야 할 결함으로 보지 않는다.
그 반응은 내가 인간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그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더 많이 지치기도 하고, 더 많이 상처받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자주 아프다.

그러나 나는 그 대가를 계산한 끝에 아픈 사람을 정리하는 쪽이

더 큰 손실이라고 판단했다.

그 손실은 돈이나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의 문제다.


“건강한 관계만 유지하라”는 조언은 사실 개인을 위한 말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의 편의가 있다.
아픔을 함께 감당하지 않기 위해 그 부담을 개인의 선택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 구조 안에서 사회는 말할 수 있다.
차별하지 않았다고, 누구도 배제하지 않았다고.

그러나 실제로는 아픈 사람들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될 뿐이다.
숨고, 고립되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된다.
이것이 과연 건강한 사회인가.


나는 아픈 사람이 죄인이 되지 않는 사회를 꿈꾼다.
아픔이 곧 무능이나 위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 회복 이전에도 관계가

허락되는 사회다.

그 사회는 완벽한 개인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서로의 취약성을 견딜 수 있는 구조를 전제로 한다.
그 구조 안에서 사람은 아파도 인간일 수 있다.


나는 아픈 사람을 정리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미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숭고한 결단이 아니다.
다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세계에 조용히 고개를 젓는 행위에 가깝다.

나는 끝내 아픔을 이유로 관계를 끊는 세계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부적응을 나는 실패로 부르지 않으려 몸부림 친다.


이 글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아픈 사람이 배제되지 않는 세계를 우리는 정말로 원하지 않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건강을 말하는 방식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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