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전쟁은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이 죽어야 멈추는가
전쟁은 언제나 명분으로 시작된다.
안보, 자위, 보복, 억지. 단어들은 단단하고 논리는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그러나 그 명분이 실제로 도달하는 지점에는 언제나 다른 얼굴들이 있다.
선택하지 않았고, 결정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이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가장 쉽게 사라지는 존재가 아이들이다.
이번 이란을 둘러싼 충돌 속에서도 그 장면은 반복된다.
무너진 건물과 불타는 거리 깨진 유리창과 검은 연기 사이에서 구조되는 것은
늘 같은 종류의 몸들이다.
작고, 연약하고 아직 세계를 이해하기도 전에 그 세계에 의해 제거되는 존재들.
그들은 군인이 아니다.
어떤 정치적 입장도 갖지 않았고,
어떤 전략의 일부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우리는 그들을 ‘민간인’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중립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장 강력한 거리 두기의 장치다.
‘민간인 피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순간 죽음은 개별성을 잃는다.
이름이 지워지고, 얼굴이 흐려지고 삶의 맥락이 삭제된다.
아이 하나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수치로 변환된다.
그리고 수치는 언제나 비교되고 관리되고 정당화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전쟁은 윤리의 언어를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
동시에 그 언어를 비워낸다.
국제법은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협약들은 비전투원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실제의 전쟁은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애초에 그것을 유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폭격은 구분하지 못하고 미사일은 판단하지 않는다.
‘정밀’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정확함이 아니라 확률이다.
그리고 그 확률 속에서 아이들은 반복적으로 희생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구조’다.
아이들의 죽음은 우발적 결과가 아니라,
현재의 전쟁 방식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산물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왜 이 죽음은 계속 허용되는가.
답은 잔인할 정도로 명확하다.
아이들의 죽음이 전쟁을 멈추게 하는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의 죽음을 비극으로 규정한다.
애도하고, 분노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그 감정은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죽음은 여전히 ‘부수적 피해’라는 범주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말은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의도가 없었다는 이유로 결과의 무게는 희석된다.
책임은 분산되고, 판단은 유예된다.
그 사이에서 같은 종류의 죽음이 반복된다.
아이가 죽었지만 그것은 목표가 아니었다는 설명.
그래서 그것은 비극이지만 범죄는 아니라는 결론.
이 논리가 유지되는 한 전쟁은 스스로를 멈출 이유를 갖지 않는다.
문제는 이 판단 구조 자체다.
우리는 오랫동안 결과보다 의도를 중심으로 윤리를 구성해 왔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이 기준은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낸다.
결과가 반복적으로 동일하다면 그 결과는 더 이상 우연이 아니다.
의도가 무엇이었든 아이들의 죽음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면,
그 행위는 그 결과를 포함한 것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그 선을 긋지 않는 한 어떤 전쟁도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는다.
아이 한 명의 죽음이 발생하는 순간
그 전쟁은 이미 실패한 것이라는 명제는 감정적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윤리적 기준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어떤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여하지 않은 존재가 반복적으로 죽는 구조라면 그 구조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 죽음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한다.
왜 그런가.
전쟁은 언제나 효율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확실하게 끝내기 위한 선택들은 결국
가장 취약한 존재들을 먼저 희생시키는 방향으로 수렴한다.
방어할 수 없는 존재, 도망칠 수 없는 존재, 결정권이 없는 존재.
아이들은 그 모든 조건을 동시에 만족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죽는다.
이건 비극이 아니라 구조다.
그리고 이 구조는 언어를 통해 유지된다.
‘민간인 피해’, ‘부수적 손실’, ‘불가피한 희생’.
이 표현들은 사실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 사실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든다.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지만,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낮춘다.
그렇게 조정된 감각 속에서 우리는 같은 장면을 반복적으로 소비한다.
하지만 그 소비는 아무것도 멈추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질문을 다시 세워야 한다.
도대체 얼마나 더 죽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겉으로는 한계를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계를 유보하는 방식이다.
숫자를 기준으로 삼는 순간 그 숫자는 언제든 늘어날 수 있다.
백 명이 아니라 천 명, 천 명이 아니라 만 명.
기준은 계속 이동하고 멈춤은 계속 지연된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원칙이다.
아이의 죽음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원칙.
이 문장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준이 부정되는 순간 우리는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결정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전쟁은 바로 그 공백에서 확장된다.
전쟁을 멈추는 것은 상대를 제압하는 일이 아니다.
정당화의 언어를 거부하는 일이다.
‘필요한 희생’이라는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순간
전쟁은 지속될 명분을 잃는다.
폭력은 여전히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정당성을 잃은 폭력은 구조를 유지하지 못한다.
결국 이 문제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어떤 언어를 받아들이는지 어떤 설명을 용인하는지의 문제다.
아이의 죽음을 들었을 때 그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수치로 처리할 것인지.
그 선택이 반복될수록 구조는 강화되거나 균열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쉽게 정리해 왔다.
너무 쉽게 이해했고 너무 쉽게 넘어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아이들은 계속 죽어왔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이 죽어야 멈출 것인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왜 단 한 번도 그 질문이 멈춤의 조건이 된 적이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