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AC라는 이름의 화려한 소외

거대 자본과 알고리즘이 인디 뮤지션을 지우는 방식

by 박온유

OAC/ 공식 아티스트 채널’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으면 인정처럼 느껴진다.


음표 배지가 주는 기만

내 채널 이름 옆의 작은 음표, OAC(Official Artist Channel).

플랫폼이 공인한 '공식'의 증표. 하지만 이 왕관은 권력이 아니라 고립의 상징이다.

자본이 설계한 성벽 안에서 인디 뮤지션의 목소리는 '공식적'으로 지워지고 있다.

처음 이 음표가 그들에 의해 달렸을 때 나는 플랫폼이 나를 확인했고

내 음악이 하나의 좌표로 등록되었다는 감각이 생겼었다.

그러나 그 감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이름표는 예우가 아니라 편입이다.

선택권이 없는 구조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규칙을 바꿀 수 없는 시스템에 스스로를 맡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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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의 유튜브는 여전히 기회의 땅처럼 보인다.

누구나 올릴 수 있고 누구나 발견될 수 있다는 서사가 작동한다.

그러나 실제 구조는 이미 완성된 성벽에 가깝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만 그 안에서 이동하는 경로는 철저히 통제된다.

그래서 질문이 남는다.

왜 영혼을 갈아 넣은 3분 20초의 노래는 조회수 100회에서 멈추고

누군가의 15초짜리 농담은 수백만 회를 기록하는가.

이 격차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가 선택하는 방향의 문제다.


유튜브라는 생태계는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다.

대형 기획사와 연예인은 유입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영향력을 그대로 이동시킨다.

방송, 팬덤, 광고, 협업이 한 몸처럼 연결된 상태로 플랫폼에 들어온다.

그들의 첫 업로드는 시작이 아니라 확장이다.

반면 인디 뮤지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구독자도 없고 유입 경로도 없으며 연결된 네트워크도 없다.

같은 플랫폼 위에 서 있지만 서로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알고리즘은 중립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 시스템은 ‘좋은 음악’을 찾지 않는다. ‘빠르게 반응이 오는 콘텐츠’를 선택한다.

클릭, 체류 시간, 반복 시청 같은 지표가 곧 가치가 된다.

자본이 투입된 자극적인 콘텐츠는 처음부터 반응 속도가 빠르다.

이미 팬이 있고, 이미 기대가 있고, 이미 공유될 준비가 되어있다.

그 결과, 그들은 고속도로 위를 달린다.

반면 인디의 음악은 골목길에 머문다.

발견되기 위해 필요한 최초의 속도를 만들지 못한 채

알고리즘의 기준에서 탈락한다.

깊이와 메시지는 평가 대상이 되지 못하고 반응 속도만이 남는다.


이 구조 안에서 수익이라는 단어는 기묘하게 변형된다.

유튜버가 아닌 사람이 유튜브에서 수익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몇십만, 몇백만의 조회수가 전제되지 않는 한 수익은 발생하지 않는다.

음악은 듣기 위해 존재하지만 이 시스템 안에서는 광고를 붙이기 위한 조건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수익 창출 패키지’ 같은 상품이다.

약 60만 원의 비용을 지불하면 무언가 달라질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다.

구조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자격을 얻는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이 구조는 아티스트의 소외감을 먹고 자란다.


음악은 점점 도구가 된다.

표현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광고를 실어 나르기 위한 매개로 취급된다.

이 전도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진행된다.

그 사이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전쟁을 말하고, 인권을 말하고, 기억을 붙잡으려는 노래들이다.

이런 곡들은 빠른 반응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소비를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알고리즘의 소음 속으로 가라앉는다.


실제 데이터는 이 구조를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내 채널에서는 진심을 담은 음악이 조회수 24회에 머문다.

하지만 심심풀이로 올린 일상적인 짧은 영상은 1.8천 회를 기록한다.

플랫폼이 무엇을 밀어주고 무엇을 외면하는지 이보다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표는 없다.

이 상황에서 선택지는 하나로 좁혀진다.

이 구조에 맞춰 스스로를 변형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남을 것인가.


나는 후자를 선택한다.

60만 원짜리 화장품으로 이 부조리를 덮지 않는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나를 재구성하지 않는다.

조회수 24회라는 결과를 실패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숫자는 정직하다.

이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기록이다.

왜곡되지 않은 데이터이자 숨기지 않은 결과다.

그래서 이 낮은 숫자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증거가 된다.

이 시스템이 무엇을 밀어내고 있는지

무엇을 남기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흔적이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이 있다.

플랫폼이 외면한 이 목소리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도달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왜 여전히 노래를 멈추지 않는가.

아마도 답은 단순하다.

이 구조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닿지 않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이 적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싸움은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가성비의 문제가 아니다. 극악의 구조 속에서도 계속 남아 있으려는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