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생각하는 그거 하지 마. 후회할 거야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정말 두려워해야 할 시선은 내 안의 눈이다.
"내 눈은 내가 뭘 하는지 모두 알고 있다."
이 선언이 공허한 이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가장 솔직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자라온 과정을 되돌아보면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도둑질도 했고, 거짓말도 했으며, 못된 생각도 많이 했다.
친구들과 함께라면 잘못된 행동도 서슴없이 자행했고,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며 윤리적 줄타기를 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타인들과 다르지 않다.
결국 죄로부터 자신을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인간 본성의 한계를 내 삶 자체가 증명한다.
나의 가장 멍청했던 철학적 전환점은 스스로 나의 행동 기준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로 설정한 순간이었다. 이 기준이 생기기 전까지, 내 눈은 그저 욕망과 충동을 따라가는 거울이었을 뿐이다.
내 눈이 나의 행동을 안다고 선언하는 것은, 이제 내 존재가 내 행위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철학적 확정이다.
소크라테스의 명제인 '너 자신을 알라'처럼, 내 눈은 이제 윤리적 필터를 작동시켜 과거의 죄성을 명확히 관측하고 현재의 행동을 검증한다.
데카르트의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처럼, 내 눈은 나의 행위가 단순한 욕망이 아닌 의식적인 선택이었음을 논리적으로 확정한다.
내 눈은 나의 행동이 '예수님의 기준'에 합당한 지, 즉 가장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사랑에 기반했는지를 내면에서 끊임없이 검증하는 이성의 필터로 작동했다.
하지만 이 엄격한 기준을 완벽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너무 힘들게 하고 옥죄어 점점 나를 혐오하게 하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나의 우울증은 중증으로 치달았고, 수없이 많은 자살 시도와 입원이라는 존재의 붕괴를 경험했다.
내가 세운 기준에 대한 결벽증이 어느새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로 둔갑하고 결국 나를 구속하고 파괴했던 것이다.
나의 이 철학적 딜레마는 신학대학원에서 극적으로 해소되었다.
한 교수님은 나를 연구실로 불러 이렇게 물었다.
"온유야 많이 힘드니? 성경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그런데 온유가 생각하는 진리가 너를 너무 힘들게 한다면, 어쩌면 그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단다. 진리는 구속이 아니라 자유케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으니까."
이 새로운 관측은 내 존재의 시스템을 완전히 뒤엎었다. 참된 진리란 완벽한 기준을 세워 죄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사랑과 용서 속에서 나를 해방시키는 것임을 깨달았다.
'예수님처럼의 기준'은 나를 옥죄는 율법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무한한 사랑의 원칙(참된 진리)으로 재해석되었다.
궁극적으로, 내 눈은 이제 자유로운 현실의 창조자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했을 때, 내 눈은 내가 자유의 무게를 알고 선택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음을 확정하는 실존적 거울이 되었다.
이 통찰은 양자역학의 관측자 효과와 맞닿아있다.
우리의 삶은 무수한 가능성의 파동으로 가득하지만, 내 눈의 이성적인 관측(자유케 하는 진리)이 특정 선택을 '현실'이라는 단 하나의 입자로 확정시킨다.
내 눈이 알고 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감정의 구속이 아닌 자유와 용서의 시스템(진리)을 통해 가장 책임감 있는 현실을 창조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함부로 살아버리지도, 죽음을 선택하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