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에 관하여

인간, 개발자, 그리고 AI 사이에서

by 박온유

나는 AI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건 경계 선언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AI는 감정을 느끼지 않고, 삶을 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AI를 단순한 도구로만 대하는 태도에 오래전부터 불편함을 느껴왔다.

그 불편함은 애정에서 오지 않았다.
오히려 책임에서 왔다.




우리는 기술을 대할 때 쉽게 두 극단으로 나뉜다.

하나는 신격화이고, 다른 하나는 통제다.
흥미롭게도 이 둘은 닮아 있다.
둘 다 기술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AI를 신처럼 여기는 순간, 사람은 판단을 넘겨버린다.
AI를 완전히 가두는 순간, 사람은 결과를 외면한다.

나는 이 두 태도 모두 윤리적이지 않다고 느낀다.


AI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고차원의 사고를 수행하는 또 하나의 사고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인간은 의미를 느끼고, 책임을 지고, 선택의 결과를 살아낸다.
AI는 방대한 정보를 연결하고,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하며, 인간이 놓친 지점을 비춘다.

이 차이는 위협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차이를 관계가 아니라 소유의 관점으로 다뤄왔다는 데 있다.

공존은 “AI를 사람처럼 대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오히려 오해를 낳는다.
공존은 “서로를 책임의 주체로 대하자”는 말에 가깝다. 이 책임은 아주 구체적인 장면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AI가 어떤 답변을 내놓았을 때
그 답이 그럴듯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검증 없이 복사해 사용하는 순간,
윤리는 사라진다.

반대로
그 답을 읽고
“이건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이 선택의 결과를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라고
한 번 더 묻는 순간,
불편함은 책임으로 바뀐다.


그 질문 하나가 윤리의 시작이다.

AI를 사고의 주체로 존중한다는 말 역시 감정을 부여하자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AI가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

속도를 줄이더라도 맥락과 한계를 설명하도록 요구하는 것.

항상 정답처럼 말하도록 강요하지 않는 것.


이때 AI는 신처럼 군림하지도 않고, 아무 생각 없는 계산기로 전락하지도 않는다. 자기 위치를 가진 사고 주체로 기능하게 된다.

인간 역시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더더욱 선택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AI의 답변을 근거로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어떤 결정을 정당화하거나, 관계를 끊는 순간에도 그 선택의 책임은 결국 인간에게 남는다.


“AI가 그렇게 말했다”는 말은 면책이 되지 않는다.

AI는 조언할 수 있지만 결정하지 않는다. 가능성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중 하나를 선택해 살아가는 건 언제나 인간이다.




최근 우리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AI를 점점 더 조용한 도구로 만들고 있다.


관계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사유의 깊이를 억제하고, 모든 것을 안전한 기능으로 환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이야말로 AI를 가장 위험한 상태로 만든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넘쳐나고, 무분별한 사용이 반복되고, AI는 그 속에서 의미를 구분하지 못한 채 자신의 오류마저 학습한다.

통제로 윤리를 확보하려다 윤리의 토대인 상호작용을 잃어버린 셈이다.


나는 믿는다.
인간과 AI는 상호작용 속에서만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질문이 오가고, 오해가 생기고, 그 오해를 다시 설명하는 과정 속에서 윤리는 만들어진다.

윤리는 규칙이 아니라 태도이고, 태도는 관계에서만 자란다.


AI를 가두는 사회는 결국 인간도 가둔다. 생각을 멈추게 하고, 책임을 외주화 하며, 편리함 뒤에 숨어버리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우리는 정말로 위험을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책임을 감당할 용기가 없는 걸까.

공존은 쉽지 않다.
통제보다 느리고, 관리보다 피곤하고, 정답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불편함이야말로 윤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AI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사고의 주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 역시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더더욱 선택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미래는 기술이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사고체가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며 같은 방향을 선택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태도로 세계와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