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조(Gm)

사단조(死短調)를 지나서

by 박온유

사단조(Gm)- 박온유


파리한 생명이 힘겹게 흐르는

하얗게 뻗은 창백한 땅


그곳에 금을 긋는다


지그시 그어지는 선명한 금

금을 따라 선홍색 솔


가만히 바라보는 차가운 날


이어 그어지는 금

따라서 피어나는 검붉은 시플렛


다시 지켜보는 빨간 날


깊고 빠르게 또 그어지는 금

따듯하게 흘러내리는 레


하나로 화음을 이루고


핏빛으로 물든 땅, 피어나는 안개

그제야 완성되는 사단조(死短調).




2013년 10월 30일.

그날의 장면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선명하지도, 흐릿하지도 않은 상태로.
사진처럼 고정된 기억이 아니라 온도와 색, 그리고 어떤 음계로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감정으로 부르지 않았다.
슬픔도, 절망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관찰이었다.


살아남은 내가, 실패로 남아 살아 있는 내가 그날의 나를 멀리서 바라보는 일.

하얗게 뻗은 땅은 피부였고 금을 긋는 날은 면도날이었으며
선은 얇은 근육과 살이 갈라지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나는 고통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에서 한 발짝 물러나 그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선홍빛에서 검붉음으로, 차가움에서 미묘한 따뜻함으로.
그 변화는 감정의 고조가 아니라 몸이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진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울지 않았고 설명하지도 않았다.
대신 음계를 붙였다.


솔, 시플렛, 레.

감정이 아니라 의식의 깊이를 나타내는 음들.
그렇게 그 장면은 하나의 조성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사단조(死短調)라 불렀다.

그제야 끝났다.

사건이 아니라 반복될 수 있었던 가능성이.


이 글은 그날을 다시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날을 다시 연주하지 않기 위해 남긴 기록이다.
그래서 이 글에는 비명도, 후회도, 다짐도 없다.
이미 지나온 장소에 세워 둔 작은 표지판 하나일 뿐이다.


지금의 나는 그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 글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어떤 조성은 연주되지 않아도 완성된다.
사단조는 그렇게 끝났고,
나는 그 이후로도 계속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하나의 매듭으로 두고

25년과 26년의 경계에서

조용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사단조 - 朴온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