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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r 03. 2019

힌디어 공부를 해볼까?

우연과 필연, 그 어디에


우리의 신혼집은 안산의 어느 작은 빌라 4층이었다. 상록수역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집 근처에는 여러 빌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지만, 바로 옆에 큰 공원과 대형 교회가 있어서 언제든지 공원을 거닐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뚜벅뚜벅 걸으며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집에서 7분 정도 걸어가면 대동서적이 있었다.  주말이면 서점으로 놀러 가 책을 구경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월급날이 되면 서점에 가서 나를 위한 책 한 권을 사는 것이 크나큰 행복이었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던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와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출간되는 족족 사다 읽었다. 그리고 좁은 거실의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던 하늘색 책장에 고이고이 간직했다. 책장에 책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뭔가 뿌듯함을 느꼈다.



여러 판타지 소설책 사이에 힌디어 책이 한 권 꽂혀있었다. 이 책도 대동서적에서 사 온 것이었다.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었던 시절인데, 무엇 때문에 그 책을 샀는지 모르겠다. 그 힌디어 책은 우리와 함께 치타공을 거쳐 다카를 지나 지금, 인도에 함께 와있다.


12년 전, 네팔에서 봉사활동을 했을 때, 네팔어 공부를 했었다. 난생처음 접한, 빨랫줄에 걸려있는 듯한 글자들을 하나하나 외우고 문법을 익혀서 말하고,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네팔어를 잊어버리지 않았고, 가끔 네팔리 친구와 네팔어로 대화를 하기도 했다.


방글라데시에 처음 갔을 때, 네팔어 덕분에 벵골어를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문법이 다르고, 글자도 달랐지만, 비슷한 어휘가 꽤 있어서 남들보다 더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벵골어를 말하고 쓰고, 읽을 줄 알게 되면서부터 네팔어는 내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버렸다. 비슷한 두 언어 사이에서 나의 뇌는 좀 더 많이 사용하는 벵골어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네팔어는 점점 멀어져 갔다.

방글라데시에서 지내는 동안 네팔에 방문할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가족여행으로, 한 번은 친한 친구의 슬픈 소식으로 방문을 했었다. 네팔에 가면 네팔어가 생각이 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내 머리와 입에서는 벵골어만 맴돌았고, 벵골어도 네팔어도 아닌 말이 짬뽕되어 나왔다. 이틀이 지나니 서서히 네팔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났고,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의 공용어 힌디는 네팔어와도 비슷하고 벵골어와도 비슷하다.


글자는 네팔어와 정말 똑같고, 여러 단어들은 벵골어와 비슷하다. 이 세 언어 모두 우리나라와 어순이 같다. 하지만 힌디어는 약간의 유럽식 언어가 섞여있다. 단수와 복수에 따라 동사가 바뀌고, 여성과 남성에 따라 바뀌는 모습이 꼭 유럽의 다른 언어 같다.


여러 언어들을 공부해본 경험이 있던 나는, 인도에 오면 힌디도 금방 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난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숫자가 거의 비슷해 가격을 흥정할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3개월 전, 힌디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힌디어 선생님을 구했다. 새로운 나라에 잘 적응해서 살려면 그 나라의 언어를 익혀야 된다는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생각에서였다. 벵골어를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에서 지내는 것이 힘들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힌디어를 익혀서 인도에 잘 녹아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매주 월요일 오전, 우버택시를 잡아 타고 힌디어 선생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은 우리 집에서 30분 정도 가야 했다. 아주 오래된 현지식 빌딩에 살고 있던 그녀는 이미 여러 서양사람들에게 힌디를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첫째 날 한 시간 내내 힌디어 글자를 읽고 쓰기만 했다. 그리고 그다음 시간에도 읽고 쓰기만 계속했다. 난 힌디어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네팔어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글자를 읽고 쓰는 것이 시간낭비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녀는 내가 힌디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과 힌디어와 네팔어 글자가 똑같다는 사실에 매번 감탄을 했다. 나는 기본적인 회화를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읽고 쓰기만을 강요했다. 결국, 아이들의 겨울방학을 핑계로 더 이상 힌디 수업을 하지 않게 되었다.

힌디 글자


인도 사람들은 영어를 꽤나 잘한다. 매우 유창한 사람들이 많다. 내가 힌디어를 잘해서 모든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잘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굳이 힌디를 못해도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간단한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고, 그들이 하는 말을 내가 못 알아 들어도 대충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힌디어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그 시간에 영어 공부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힌디어를 공부해서 인도에 잘 녹아들려는 내 마음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며칠 전, 거실 책장에 꽂혀있는 힌디어 책을 발견했다. 우리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와중에도 굳건하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왜 이 책을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책을 들춰보니 앞부분에 볼펜으로 여기저기 줄을 그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집에 있던 힌디어 책

책을 손에 들고 큰 소리로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뭔가 입에 착 감긴다. 3달 전에는 아무리 연습해도 익숙하지 않던 말이 지금은 왠지 익숙하다. 내친김에 몇 줄 더 읽어 보았다.

"야ㅎ 바훗 앗차 라르까 해. (이 사람은 매우 좋은 소년이다.)"

"야ㅎ 바훗 쑨다르 라르끼 해.(이 사람은 매우 예쁜 소녀이다.)"


7개월 동안의 인도 생활 덕분에 벵골어가 점점 사라지고 힌디어가 스멀스멀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다시 힌디어 공부를 해볼까?




8년 전에 힌디어 책을 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내 삶에서 인도라는 나라는 그저 멀리 있는 힌두신들의 나라일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을 위해 이 책을 산 것만 같은 이 느낌적은 느낌은 도대체 뭔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우연인 것 같지만 오늘을 위한 필연이었다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감이라고나 할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보이지 않는 시간 외의 공간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이제 힌디어를 다시 공부해야 할 것만 같다. 그들의 언어가 입에 착착 감기는 지금이 공부해야 할 때임을 알려준다. 해야 될 일이 하나 더 늘어났다. 공부하다 보면 어느새 힌디어도 유창하게 될 날이 올까? 힌디를 말하게 되면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좀 더 애정이 생길까?


알 수 없지만, 미래에 마주하게 될 필연을 위해 내 손에 쥐어진 우연이라는 끊을 놓지 않고 잡아당겨본다.



"떠빠이꼬 남 께 호?"(네팔어)
"아쁘날 남 끼?"(벵골어)
"앞끼 남 꺄 해?"(힌디어)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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