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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Sep 05. 2024

23.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구진 군 시외버스 정류장은 1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합실 의자에서 풍기는 진득한 냄새, 들고 나는 버스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 정류장 뒤에 있는 식당에서 나는 국밥 냄새. 지아는 여전한 냄새를 맡으며 대합실 의자에 앉아있었다. 변한 거라면 쨍하게 파란색이었던 의자가 구름이 잔뜩 낀 하늘색이 되어있었다는 것이었다. 문득, 며칠 전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이 너무 많이 변해 엄마도, 지아도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데 반해 또 어떤 곳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아를 안도하게 했다. 


지아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는 유독 변화를 싫어하는 나라이다. 대신 과거의 것을 잘 보존하고 유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밀라노 시내의 건물들은 대부분 100년이 넘었다. 그 건물에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다.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달지 못하기 때문에 선풍기에 의지해 여름을 나거나 인터넷을 연결할 때 구멍을 뚫는 대신 먼 길을 빙 돌아 연결해야 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얽매여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해 뒤쳐진다고 말하지만, 과거에 이루어 놓은 화려한 역사 덕분에 지금껏 누리며 살았으니 선조의 것을 지키는 것은 후손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말했다. 


지아는 성질 급한 한국사람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느리고 여유를 좋아하는 이탈리아 사람들 틈에 살다 보니, 때에 따라 빠르고 느림을 조절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어쩌면 눈치껏 살아내야 했던 어린 시절 덕분에 눈치 빠르고 일머리가 있는 어른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지아는 핸드폰을 들고 며칠 전 진우가 보내 준 사진을 다시 드려다 보았다. 내 표정이 이랬던가? 내가 이렇게 웃는 사람이었던가? 지아는 자기도 모르던 자신의 모습을 자꾸만 진우에게 들키는 것 같았다. 어렸을 적에 진우가 준 사진은 밀라노 집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진우가 준 별 모양 핸드폰 고리 역시 책상 서랍 안에 담겨 있다. 처음엔 핸드폰에 달고 다녔었다. 그러다 실수로 바닥에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박혀 있던 큐빅 2개가 빠지고 말았다. 그 뒤로 지아는 핸드폰고리를 고이고이 서랍에 넣어두었다. 밀라노의 100년 된 집처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길 바라며 고이고이 모셔둔 것이었다. 


어제는 드디어 보리소리 북카페 사장님께서 할머니 시집의 편집을 마쳤다며 파일을 보내주었다. 그 파일에는 할머니의 시뿐만 아니라 진우가 찍은 사진도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었는데, 할머니가 사랑했던 이곳의 풍경을 보니 그리움의 정서가 잔뜩 느껴졌다. 그것이 진우가 의도하여 사진에 담아낸 그리움인지, 아니면 시를 통해 느껴지는 아련함인지, 지아는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이제 며칠 뒤엔 할머니의 시집이 정말 세상에 나올 것이다. 시집이 나오면 제일 먼저 할머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때까지 할머니가 제발 무사하기를, 지아는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한번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혼수상태에 빠진 할머니는 며칠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카톡”

지아는 새로운 메시지가 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도 엄마가 아닌 민기였다. 

“나 10분 후에 도착.” 

“바 베네 va bene. 나 지금 기다리는 중” 

광주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내려오고 있는 민기였다. 민기가 한국으로 대학을 간 후 계속 만나지 못했다. 거기에 군대까지 갔으니, 여기서 민기를 만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민기는 유독 이탈리아 보다 한국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7살 때 이민을 온 민기는 한국에 대한 기억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이탈리아 말을 잘 못해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할 때마다 다시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그때마다 민기를 도와준 건 다름 아닌 이탈리아 말을 잘하는 한국 친구들이었다. 지아는 그 친구들 중에 한 명이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좋으면 좋다고 숨기지 않고 말하는 민기가 지아는 부러웠다. 감정에 솔직한 건 그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같았다. 

버스 한 대가 들어오더니 끼익 소리를 내며 멈췄다. 버스 문이 열리고 대여섯 명의 사람이 내렸다. 그리고 맨 끝에 사복차림의 민기가 있었다. 

“야, 민기 리. 웰컴! 꼬메스따이? 야, 이게 얼마 만이냐?”

“헤이 지아!” 

오랜만에 만난 지아와 민기가 볼 뽀뽀를 하며 인사할 때 작은 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에 한 명이 몰래 찍은 사진을 구진 FC 단톡방에 올렸다. 그 사진을 본 진우는 가만히 가게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아야, 너 어디야?”

“응. 조금 전에 친구가 와서 만났어. 지금 버스 터미널이야.”

“아, 그래? 그럼…. 점심은?”

“아직 안 먹었어. 이제 먹으러 가려고. 어디가 맛있어?”

“터미널이라면…. 거기서 나와서 왼쪽으로 꺾은 후 위로 한 100미터 올라가면 하나로 마트가 있어. 거기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서 들어가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진짜 맛있는 돼지갈비 집이 있거든. 거기 냉면도 끝내주는데. 어딘 줄 알겠어?”

“어? 그러니까 왼쪽으로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 어디라고?”

“아니다. 내가 지금 갈게. 친구랑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정말? 그래주면 고맙지. 얼른 와, 같이 점심 먹자.” 

진우는 바로 짐을 챙겨 가게를 나섰다. 




지아와 민기가 한국말과 이탈리아 말을 섞어가며 대화할 때 진우는 조용히 고기를 구웠다. 그들의 이야기 틈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지아가 밀라노에 산다는 것뿐이었다. 다행히도 숯불에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 덕분에 진우는 어색함을 숨길 수 있었다. 

“아참, 세형이가 피렌체에서 스냅사진 사업을 시작했다는데.”

“어머 세형이가? 몰랐네. 내가 공부한다고 연락을 끊고 살았거든. 피렌체로 내려간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사진 좀 봐바. 진짜 잘 찍더라니까. 눈에 조금씩 입소문이 났나 봐. 마케팅을 좀 잘한 것 같더라.” 

민기가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고기를 자르고 있던 진우는 사진이라는 말에 고개를 들어 핸드폰을 드려다 보았다. 

“와, 진짜 멋지다. 세형이가 이렇게 사진을 잘 찍는지 몰랐네. 아참, 진우도 사진 잘 찍는데.” 

갑작스러운 지아의 말에 진우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 아니야. 난 그냥 재미로 찍는 거야.”

“아니야. 진우 네 사진도 진짜 좋아. 사실은 우리 할머니 시를 모아서 이번에 시집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진우 사진을 넣었거든. 정말 그리운 감성이 막 느껴졌어.”

지아가 핸드폰에 남아 있는 진우의 사진을 민기에게 보여주었다. 

“와, 진우 씨 사진도 정말 느낌 있네요. 뭐랄까…. 프로 같진 않지만 다정한 느낌?” 

“그렇지? 정말 따뜻하지.” 

진우는 그 말이 마치 자기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당황한 진우가 지아의 접시에 고기를 올려주며 말했다. 

“고기 먹어. 고기.” 

“고마워, 진우야. 고기는 내가 쏠게.” 

“좋아. 그럼 2차는 내가 쏠게.” 

“어, 그럼 난?”

“군바리는 넣어두세요. 여기까지 와줬는데 무슨 말이야.”

“어, 그래. 고맙다, 친구야.” 



지아와 민기의 스스럼없는 모습에 진우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아까 두 사람이 볼을 맞대고 뽀뽀하는 사진을 보았는데, 진우는 두 사람의 사이가 더욱 궁금해졌다. 

“두 사람, 그냥 친구?”

진우의 질문에 민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사실은…. 내가…. 어렸을 적에 고백했다가 차였어요.” 

민기의 말에 지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그게 무슨 고백이냐?”

“그것도 일종의 고백이었어. 어휴 그때 나 때문에 핸드폰 떨어뜨렸을 때 핸드폰 고리에서 큐빅 빠졌다고 얼마나 화를 내던지. 그게 너무 미안해서 내가 비슷한 걸 구해서 선물로 줬거든. 별모양 찾느라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근데 그걸 안 받아 주더라고.” 

“야, 그만해. 고기나 먹어.” 

지아는 당황한 얼굴로 고기를 싼 쌈을 민기의 입에 넣어 입을 막았다. 진우는 빙그레 웃으며 열심히 고기를 잘라 지아의 접시에 올려두었다. 

“나 그만 주고, 너도 좀 먹어.”

“응, 먹고 있어. 너 많이 먹어.” 




제대를 한 달 앞두고 있는 민기는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고 했다. 제대 후 복학하기 전까지 유럽여행을 떠날 거라고 했다. 그런 민기의 자유로움이 부러워 진우는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서로 연락처를 교환한 민기와 진우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있었다. 



“나중에 이탈리아 여행 와. 내가 이탈리아 여행 쫘악시켜줄게. 지아는 기대도 하지 마. 쟤는 공부한다고 맨날 바쁘니까.”

“야, 내가 언제 그랬어?”

“너 이번에 떨어져서 다시 1년 공부해야 한다면서. 그럼 말 다했지 뭐. 진우야 난 시간 많아. 언제든지 연락해.”

“어, 고마워. 너도 제대하고 갈 데 없으면 연락해. 내가 우리 마을도 좋은 데 많아.” 

“그럴까? 이번엔 내가 서울도 가봐야 해서 시간이 없네 다음에 진짜 다시 올게. 여기 공기도 좋고 너무 아름답다.” 

“그래, 그래.” 

그들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약속을 서로 나누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진우는 위키백과 검색창에 “이탈리아 볼뽀뽀”를 입력했다. 


[볼키스(-kiss) 또는 볼뽀뽀는 에 하는 입맞춤 제스처로, 친구나 가족 사이에 친근감(우정)이나 존중, 위로 등을 표하는 의식이다. 남유럽동남유럽중동라틴아메리카동남아시아 등에서 흔히 인사로 쓰인다.]


진우는 검색 결과를 읽어본 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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