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는 지아를 다시 본 순간,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자꾸 되살아나 괴로웠다. 그저 어렸을 적에 느꼈던 풋풋했던 감정이라고 치부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연락 한번 없던 지아에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우리가 무슨 사이나 된다고….
매 해 여름마다 지아를 기다렸다. 하지만 지아는 오지 않았다. 금자 할머니에게 물어보면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대학에 간 후에 한 번 온 것 같은데 그때는 진우가 군대에 가고 집에 없을 때였다.
10년 전, 버스 정류장에서 처음 본 지아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 옆에 앉아있던 지아는 몹시 피곤해 보였고, 피곤함 뒤로 묻어나는 슬픔의 그림자를 진우는 눈치챘다. 밀라노라는 좋은 도시에 사는 아이의 얼굴이 왜 그 모양인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나중에 엄마 말을 듣고 조금이나마 그 아이가 지닌 슬픔의 깊이를 헤아려볼 수 있었다. 엄마의 필리핀 친구들 중에 이탈리아로 취업이민을 간 친구가 있었다. 대부분 가사도우미나 청소일을 한다고 했다. 한 친구는 방 2개짜리 집에서 8명이 모여 살며 출퇴근을 한다고도 했다.
“내 친구들보다 내가 더 좋아. 나는 진우, 진주와 함께 살잖아. 내 친구 아이 필리핀에 있어. 남편도 필리핀에 있어. 돈 벌어서 고향에 다 보내.”
엄마 친구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이탈리아에서 이민자로 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던 지아가 보조개를 보이며 활짝 웃었을 때 진우는 지아를 계속 웃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금자 씨의 시를 워드로 옮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과거에 시화전을 위해 할머니의 노트를 들춰보았던 시간이 되살아나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그때의 우리는 어떤 고민들을 했었던가…. 학업, 대학, 친구…. 매우 현실적인 고민부터 꿈이나 미래 같은 추상적인 고민도 했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엔 심각했던 고민도 성인이 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모두 그 나이만큼의 고민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진우에겐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 한 가지 있었다. 어쩌면 아주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고민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고, 그렇기에 해결하려는 의지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진우가 고3이 되던 해,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45살에 28살인 엄마와 결혼한 아빠는 어린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농사일을 무리하게 했다. 그리고 60이 조금 넘은 나이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왼쪽 편마비가 와서 더 이상 농사일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빠와 엄마는 보험비로 읍내에 작은 철물점을 차려 시골에 필요한 물건들을 팔기 시작했다. 진우는 가고 싶었던 대학을 포기하고 부모님 곁에 남기로 결정했다. 장학금을 받고 가까운 국립대에 입학한 것이다. 군대에 다녀온 후 진우는 학교로 복학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와 부모님의 철물점을 수리센터로 바꾸었다. 70이 다 된 아버지가 불편한 몸으로 계속 가게 일을 할 수도, 필리핀 사람인 엄마에게 가게를 맞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그 가게에서는 시골에서 필요한 물건도 팔고, 고장 난 전자기기 수리도 하고, 시골집 보수공사도 하는 가게가 되었다. 진우는 부모님의 곁을 지키는 착한 아들로 남았다. 동생 진주는 진우와 달랐다. 가수를 하겠다고 대학을 안 가더니 서울로 혼자 올라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음악학원에 다니고 있다.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만, 아직 큰 성과는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진주는 언제나 씩씩했다.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그 길이 힘들긴 하지만,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진우는 금자 씨의 마지막 글을 워드로 옮겨 적었다. 그건 금자 씨가 지아에게 남긴 편지였다. 하지만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꿈을 놓지 마.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 꿈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꿈을 잃지 않는 거더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군지 아니?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
진우는 책장 위에 놓여있는 디지털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케이스 위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요즘엔 다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니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진우는 디지털카메라로 사진 찍는 게 좋았다. 사진을 찍어 노트북으로 사진을 옮겨 하나하나 다시 보는 일도 즐거웠다. 진우는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후~ 먼지를 불었다. 옆에 있던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기까지 했다.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거기엔 우주와 금성이, 목성이, 동네 어르신들의 모습, 호리산에서 바라본 호수와 청보리밭 등 구진 군의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엔 얼마 전 호리산에서 찍은 지아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진우는 한참 동안 지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는 걸 진우는 알고 있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현재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미래가 있을 때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진우는 아무것도 가늠해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지아의 마음조차도. 이 또한 20대이기에 할 수 있는 고민이겠지. 30대가 되면 이 또한 별것 아닌 일이 되고 말 것이다.
“후~ 난 왜 모든 게 이렇게 어렵지.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진우는 혼잣말을 하며 디지털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마지막 글까지 모두 컴퓨터로 옮긴 진우는 파일을 저장한 후 보리소리 북카페 사장님에게 보냈다.
[사장님, 지금 메일로 보냈습니다.]
[고마워요 진우 씨, 그런데 카톡 프사 그거 진우 씨가 직접 찍은 거예요?]
[네. 제가 찍은 거 맞아요.]
[사진 정말 잘 찍네요. 저희 책방 옆에 있는 호수 맞죠?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아름다워요. 흑백으로 편집해도 느낌이 좋을 것 같고요. 시집 중간에 좋은 이미지를 함께 넣으면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진우 씨 사진을 함께 넣어보면 어떨까요?]
[네? 제 사진을요?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니에요. 느낌 좋은걸요. 몇 개만 골라서 보내줘 볼래요? 물론 책에 진우 씨 이름도 함께 넣을게요. 이게 나중에 진우 씨의 포트폴리오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가 감사하죠. 시집 잘 편집해 보겠습니다.]
갑자기 진우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었다. 진우는 이 설렘을 잃고 싶지 않았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이기에 더욱 기대되는 미래라는 걸, 진우는 그 순간 느끼고 있었다.
진우는 디지컬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노트북으로 옮긴 후 지아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대화창에 1이 사라진 순간, 진우는 다시 한번 설렘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