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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Apr 16. 2019

한국이 가장 그리울 때는?

엄마.......


"별일 없니?"

"응, 아무 일 없는데. 엄마는 잘 지내?"

"응, 엄만 맨날 똑같지. 근데 어젯밤에 니꿈을 꿨거든. 그래서 뭔 일 있나 싶었어."

"무슨 꿈인데?"

엄마는 잠시 허허허 웃으셨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무슨 꿈인데 그래?"

"네가 아들을 낳았어. 그것도 차에서."

"뭐라고? 헐, 뭔 꿈 이래."

"몰라, 하도 기분이 이상해서 뭔 일 있나 했지."

"아무 일 없어. 그리고 이제 애도 못 낳아."

"그래, 조심하고. 잘 지내고. 엄마 허리 아파서 병원 왔어."

"어, 엄마. 또 연락할게."




난 1남 4녀 중 넷째 딸이다. 막내딸은 애교가 넘치고, 부모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한다고 하지만, 난 전혀 아니었다. 애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사랑을 독차지하지도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난, 부모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독립심 강한 딸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내 옆에는 언니들이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했지만 언니들과 할머니가 계셨기에 힘들지 않았다.

그때 엄마의 나이 겨우 40대 중반.  

엄마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모두 도시로 보냈다.  단지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학교를 다녀서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대학에 가라는 이유였다. 엄마의 의지는 아니었다. 모두 아빠의 계획이었고, 아빠의 의지였다. 엄마는 그저  독불장군 같은 아빠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그 많은 자식들을 모두 떠나보냈다.


엄마와 떨어져 지낸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심한 성격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나 말고도 엄마를 잘 챙겨주는 언니들과 남동생이 있기 때문일까?

해외에 사는 동안 난, 엄마에게 자주 연락을 하지 않았다. 겨우 3시간 30분의 시차일 뿐인데, 아침에 눈 뜨면 아이들 학교 보내기에 바쁘고, 낮에는 내 일을 하느라 바쁘고, 저녁이면 엄마가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이기에 전화를 하지 못한다. 다 핑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난 그냥 그런 딸이다. 무심하고, 자주 연락하지 않고, 살갑지 않은 그런 딸.


엄마도 아빠도 나에게 먼저 전화를 한 적도 없다. 해외전화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보이스톡으로 해도 되긴 하지만, 우리 집의 인터넷이 잘 되지 않는지, 자주 끊긴다. 영상통화도 어쩌다 한번 시도해도 연결이 안 된다. 이 또한 핑계일 뿐이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를 하려고?

이미 연세가 지극하신데, 있을 때 자주 연락하고 잘해드려야지.


마음으로는 알지만, 행동이 되지 않는다. 엄마와의 특별한 추억도, 사진 한 장도 없는 넷째 딸.


내 딸은 시시때때로 나에게 들러붙는다. 껴안고 여기저기 뽀뽀를 한다. 엄마가 제일 좋다고, 사랑한다고 고백을 한다. 그런 딸을 보며, 왜 난 저런 딸이 아니었을까? 왜 난 엄마의 눈치만 살피고, 엄마에게 애교 한번 제대로 못 부린 딸이었을까? 생각한다.

 애교뿐만이 아니다. 엄마에게 짜증 한번, 화 한번 내보지 못했다. 그래서 내 딸이 나에게 짜증을 부릴 때 내 마음이 더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다.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가도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 지면 지겨웠던 그 시골이 아련하게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엄마가 보고 싶어 지는 날,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은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우리 한국 갈까? 그냥 한국 가서 살까?"

"엄마, 난 한국 가서 살긴 싫어. 그냥 놀러만 가는 것은 괜찮아."

"왜? 한국이 여기보다 더 좋잖아. 놀이터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한국 친구들도 사귈 수 있고."

"근데 한국에서 학교 다니기가 싫어. 거긴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아. 학원도 다녀야 되고. 방학도 별로 없고."

"엄마, 난 방글라데시에 다시 가고 싶어. 거기가 더 좋아."

"......."


결국, 난 내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물려주기 위해 살겠지. 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또 내 아이들은 나를 그리워하면서도 내 아이들의 아이를 위해 살 것이다. 그것이 엄마의 삶인 것을...


후회하기 전에, 조금은 살가운 딸이 되어봐야겠다.

연락도 더 자주 하고, 안부를 묻고, 사진도 자주 보내드리고.......

이게 마흔의 막내딸을 여전히 걱정은 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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