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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y 09. 2019

시골학교 노처녀 선생님

내가 선생님을 싫어하게 된 사연

내가 살던 고향, 고흥은 남쪽 끝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배지였고, 유신정권 때는 차별받는 동네였으며 지금은 논과 밭과 산, 바다가 있는 청정지역이다. 발전이 전혀 되지 않아 큰 건물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개울가에 여전히 도롱뇽이 살고, 논에는 황새가 걸어 다닌다. 여름이면 논 사이사이에 우렁이 낳아 놓은 알이 보이고, 메뚜기가 뛰어다니는 곳이다.

밤이 되면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다. 그리고 밤하늘엔 별들이 총총히 박혀있다. 시골집 마당에 앉아 하늘을 보며 북두칠성을 헤아릴 수 있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옆 마을에 있었다. 집에서 신작로 길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면 학교가 있었다. 바닷가 근처에 사는 아이들과 더 산속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의 아이들이 그 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는 우리 고모들이 다녔고, 큰언니가 다녔고 나와 내 동생이 다녔다. 아빠는 총각시절에 그 학교에서 잠시 선생님을 하기도 했다.

(아빠는 원래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다. 엄마와 결혼 후, 내가 다섯 살 때 즈음에 그만두셨고, 농사를 시작하셨다.)


옛날에는 학생수가 꽤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수가 줄어들었다  우리 학년에는 남자아이가 11명, 여자 아이가 고작 5명이었다.


이런 시골 학교의 선생님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극한 분들이었다. 하지만 가끔 젊은 여선생님이 오시기도 했는데, 그런 분은 꽤나 인기가 좋았다.


아직 초등학교로 바뀌기 전.

5학년 때 담임선생은 꽤 좋은 분이셨다. 얼굴이 하얀, 서울 말투를 쓰시는 분으로 아이들을 꽤나 예뻐해 주셨다. 우리들도 그 선생님을 좋아해 함께 종이학 천 개를 접어 상자에 담아드리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임신을 하셨다. 1학기를 마친 후 선생님은 출산 휴가를 가셨다. 그리고 2학기가 시작될 때는 다른 선생님이 오셨다.


새로 온 여자 선생님은 노처녀 선생님이었다. (그때의 기준으로는 20대 후반만 돼도 노처녀라고 생각했다.) 그 선생님은 첫날부터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는 그 선생님이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좋게 말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선생님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다른 모든 좋은 기억들을 집어삼켰을 지도.


 중간고사를 보았다.

본디 시골 아이들이라는 게 시험을 본다고 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저 부모님을 도와 일을 하다가 학교에선 함께 노는 게 다였다.

시험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나마 머리가 좀 있는 아이들은 점수가 그럭저럭 나왔지만 만점을 받는 아이는 없었다.


기말고사를 보았다.

기말고사라고 해서 아이들이 공부 할리는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모두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눈을 감으라고 했다.

중간고사보다 점수가 떨어진 아이들에게 손을 들라고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점수가 떨어졌다. 선생님은 떨어진 점수만큼 매를 든다고 했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때렸다.

우리는 12살 아이들이었다.


난 정확히 8대를 맞았다. 허벅지에 파랗고 빨간 줄이 생겼다. 난 울지 않았다. 이를 악 물고 참았다. 왜 맞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항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선생님이라는 권위로 우리를 때렸다.

아이들이 선생님께 허벅지를 맞았다고 해서 부모님들이 선생님께 항의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이 때렸다고 부모님께 말할 아이도 아무도 없었다. 우린 그냥 참고 견뎌야 했다.


난 6학년이 되면서 언니들을 따라 도시의 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뒤로 그 선생님이 시골 학교에 얼마나 더 있었는지 모르겠다.




20대 후반의 처녀 선생님이, 주위엔 아무것도 없는 시골 학교에서 지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란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때의 억울함이, 그때의 아픔이 나이가 들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뒤로 난, 선생님들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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