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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y 13. 2019

스스로 왕따가 되었다.

30년 전의 왕따

우리 반의 여학생은 매우 소수였다. 1학년 때는 9명이었지만 한 명, 두 명 전학을 갔다.


여학생이 6명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끼리 정말 잘 놀았다. 쉬는 시간이면 무조건 밖에 나가 노는 게일이었다.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네 발 뛰기(커다란 네모를 그려놓고 편을 나눠 노는 놀이), 사방 치기, 오징어 놀이(바닥에 큰 오징어처럼 그림을 그려놓고 편을 나눠 서로 잡고 도망가는 노는 놀이). 10발 뛰기(10발을 크게 뛰고, 술레는 8발을 뛴 다음 손에 잡히는 사람이 술레가 되는 놀이).

가끔은 남자아이들과 축구도 하고 야구도 했지만 여자아이들끼리 노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학교 바로 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었다. 그 개울물에는 가재나 송사리, 미꾸라지가 살고 있었다. 오후에는 친구들과 그 개울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며 놀기도 했다.


난 여학생들 중에서도 조금은 리더십이 있었던 듯하다. 자주 반장이나 부반장을 했다. 달리기를 잘해 학교 대표로 달리기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상은 타지 못했다.) 학교 대표로 글짓기 대회에도 여러 번 나갔다.( 딱 한번 최우수상을 탔다.)


시골 학교 아이들은 대부분 형제자매가 많다. 나 역시 다섯이었고, 내 친구들도 대부분 다섯이 기본이었다. 친구들의 언니, 오빠와 내 언니가 같은 반이었고, 내 동생과 친구들의 동생이 같은 반이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니 반으로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기도 하고, 친구의 누나 또는 언니에게 직접 고자질을 하기도 했다.


우리들은 나름 잘 지냈다. 하지만 어딜 가나 성격이 쌘 친구가 있는 법.


친구 S는 바닷가 마을에 사는 친구였다. 어느 날 갑자기, 친구 한 명을 지명하며 “놀지 말자.”라고 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그 친구에게 동조한 아이도 있었고, S가 무서워 반대를 못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난 계속 불만이 쌓여갔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었다. 남자아이들과 몸싸움을 하기도 했고,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도 했다.


어느 날, S는 A라는 친구와 “놀지 말라.”라고 말을 했다. 난 그녀의 부당함에 싸우고 싶었다.

 S의 말을 무시하고 A와 계속 놀았다. 자연스럽게 나와 A, S와 나머지 친구들로 편이 나누어졌다.


그 친구들 중에는 나랑 가장 친한 친구였던 B도 있었다.  

어느 날, B가 찾아와 말했다.

“난 너랑 놀고 싶은데, S가 너무 무서워. 이제 그만

우리랑 놀고 A랑 놀지 마.”


난 S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난 너의 말을 따르지 않겠노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난 A와 계속 놀았다. 보란 듯이 둘이서 밥을 먹고, 둘이 손을 잡고 놀았다.


어느 날 학교에 가니, A가 나를 못 본 채 했다. 나와 말을 하지 않았다.

“너 왜 그래?”

“사실은, 나 다른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서....

너랑 안 놀면 껴 준대서....”


결국, 난 왕따가 되었다.


그럼에도 난 굴복하지 않았다. 지기 싫었다.

난 혼자 놀았고, 남자아이들과 놀았다. 보란 듯이 잘 놀았다. 일부러 더 밝은 척했다. 눈을 더 크게 뜨고 다녔다.


몇몇 친구들이 찾아와 이제 그만 돌아오라 했지만 거절했다.

“S도 알아야 해. 그게  얼마나 나쁜건지. S가 직접 사과하기 전 까진 안 놀아. 그렇지 않으면 계속 혼자 놀 거야.”


어디서 나온 당당함인지,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결국, 난 S와 화해를 했다.

어떻게 화해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우린 다시 다 같이 놀기 시작했다. 그 뒤로 S는 친구들을 더 이상 따돌리지 않았다.


그 후로 20년이 지나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 B의 결혼식에서 S를 만났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야, 너 그때 엄청 무서웠어. 알아? 진짜 싸움닭이었지.”

“내가? 그랬다고?”

“어이구, 기억 못 하는 거 봐라.”

“야, 너는 어땠고. 너도 마찬가지였어.”

우린 그냥 웃었다.


우린 그게 왕따 인지도 몰랐다. 그게 얼마나 나쁜 일인지도 몰랐다. 그냥 그랬다.


그 친구도 지금은 결혼을 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나 또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  친구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난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친구이게 굴복하지 않았던 기억이 왠지 자랑스럽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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