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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09. 2019

우린 왜 여기에 왔을까?

치타공과의 첫 만남, 그것은 두려움 이었다.

치타공(Chittagong)은 방글라데시 제 2의 도시이다. 우리나라의 부산 같은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절대 부산과 비교할 수 없는 곳이다. 해운대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부산 같은 곳을 기대했다. 심심하면 바닷가에 가서 모래놀이를 하고 물고기도 잡으며 놀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내내 바다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방글라데시로 가는 모든 컨테이너는 치타공을 거쳐서 들어간다. 바다와 밀접한 지역적 조건으로 몇 년 전부터 외국기업들이 많이 들어왔다.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다 여러가지 조건으로 그곳을 떠나야 할 때, 최후의 지역으로 선택하는 곳이 이곳, 치타공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공장지역이 잘 형성되어 있다. 특히 봉제와 관련된 여러 기업들이 들어와 있다. 꽤 유명한 브랜드의 옷이나, 신발을 만드는 회사도 있다. 저렴한 인건비와 벵골만이라는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적인 조건은 봉제 관련 사업에 꽤나 좋은 조건이었다. 남편 또한 이들 중 한 회사에 취직이 되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방글라데시의 치타공이라는 낯선 도시로 가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네팔’ 이었다.


난27살때 5년동안 근무했던 병원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28살이 되던 1월, 네팔로 향했다. 평생 소심하게 남 눈치만 보고,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서른이 되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잘 다니던 병원에 사표를 내고야 말았다. 나름 주사도 잘 놓고, 후배들, 선배들과 도 잘 지내고, 환자들과도 사이가 좋던 간호사였다. 엄마 아빠는 기대 하지도 않았던 막내 딸이 유명한 병원에 다닌다며 은근 자랑스러워했다. 아빠는 몸이 안 좋으면 한번씩 병원에 와서 진찰을 받기도 하고, 위 내시경도 받았다. 그러다 위에 생긴 용종을 때어내는 시술도 받았다. 가족 할인이 적용되어서 부모님은 저렴한 병원비로 진료를 받을 수가 있었다. 3교대로 힘들어하는 딸을 걱정하긴 했지만, 아마도 그 병원의 간호사로 계속 남기를 원했을 것이다. 간호사라는 직업이 내 적성에 딱 맞는다며 보람을 느끼면서 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연차가 오르고, 책임감이 많아 질수록 내가 견딜 수 있는 무게가 아님을 느꼈다. 그 부담감은 넷째딸로 태어나 내 주장을 한번도 표현해 보지 못한 나에게 너무 크게 다가왔다. 결국 도피인지, 도망인지, 아니면 그저 운명이었는지……. 알 수 없는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 곳이 네팔이었다. 왜 네팔을 선택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영어도 네팔어도 한마디 못한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책에서 보았던 에베레스트의 설산에 홀려 이끌림을 당했다.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이미 네팔에 도착해 있었다.


네팔에서는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2년동안 지냈다. 네팔에서 살아 남기 위해 네팔어 공부를 죽어라 했다. 처음보는 그림같은 글자를 하나하나 외우고 익혔다. 그렇게 읽고 쓰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최초로 익힌 외국어는 영어가 아니라 네팔어이다. 중학교때부터 공부한 영어는 왜 그렇게도 머리에 안 들어오는지, 오히려 네팔어가 나에겐 더 쉽게 다가왔다.


그곳에는 여러 NGO와 다양한 나라에서 파견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봉사활동을 위해 오는 사람들이다 보니 서로 공감대가 잘 형성되었다. 그리고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기위해 잠시 여행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네팔은 이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로 인해 매우 생동감 있게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남편 역시 네팔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우리들은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그 곳에서 청년시절의 자유를 만끽했다.


나와 남편에게는 청년시절에 봉사를 하며 보냈던 네팔의 기억이 매우 강렬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네팔 음식을 잊지 못해 네팔 식당을 찾아 돌아다녔다. 우연히 네팔 사람이라도 만나면 아는 친구를 만난 것 마냥 마음이 들떴다. 그 시절에 함께 있었던 몇몇 커플들은 네팔을 잊지못해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가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베이커리 사장님으로, 대사관 직원으로, 또는 다른 NGO 직원으로 네팔에 머물고 있다. 네팔은 그런 곳이었다. 한번 네팔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곳을 쉽게 잊지 못했다. 귀소본능을 일으키는 곳이었다. 우리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다시 해외로 나가고 싶어했다. 굳이 네팔이 아니더라도 해외에 가서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바로 나갈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3년 남짓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했지만, 남편의 해외로 나가고자 하는 열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확실 해져갔다. 결혼전부터 날마다 영어 공부를 하던 남편은 결혼 후에도 영어공부를 놓지 않았다.

결혼 초, 함께 안방에서 자지 않고 거실에서 잠드는 남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다가 옆이 허전하여 거실에 나가 보면 불을 훤히 켜 놓고, 작은 앉은뱅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남편을 볼 수 있었다.

“자기야, 방에 들어가서 자.”

“응? 어, 깜빡 잠들었네. 나 자는 거 아니야.”

“지금 자고 있잖아.”

“아니야 잠깐 졸았어. 나 공부하고 있었어.”

“그래. 알아. 근데 불 끄고 들어가서 자.”

“응, 그래. 이것만 다 하고.”

남편은 날마다 미국드라마를 보며 영어공부를 했다. 어느 유명한 미국드라마 시즌 1부터, 시즌 6까지 본 걸 또 보고, 또 보고, 또 돌려 보며 영어공부를 했다. 영어 단어를 기록해둔 수첩이 쌓여갔다. 어디를 가나 그 수첩을 들고 다녔다. 남편의 낡은 영어 수첩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지금도 집에는 남편의 영어단어 수첩이 쌓여 있다. 이미 오래되어 색이 바랜 수첩들 좀 버리자고 했지만, 남편은 자신의 영어공부에 대한 열정과 추억이라며 절대 버리지 못하게 한다.


첫 아이 임신 5개월쯤부터 남편은 갑자기 터키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매주 토요일 마다 터키에서 온 유학생에게 터키어 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남편의 터키로 가겠다는 열망은 점점 더 확실 해졌고 호시탐탐 터키로 갈 수 있는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드디어 터키 주재원을 뽑는 자리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3차까지 합격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 면접을 남겨두고 남편은 거의 확실하다며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마지막 회장님과의 면접 때,

“우리 회사는 가족과 갈 수 없어요. 가족에 대한 지원은 하지 않습니다. 가능 하겠습니까?”

“아니요. 전 가족과 꼭 함께 가야 합니다.”

가족과 함께 가 아니라면 그 어디도 갈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한 남편은 결국, 최종 불합격이 되었다. 터키에 대한 꿈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미 사표도 시원하게 던져 놓은 상태였다. 난 첫째 아이를 임신해 곧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남편은 다시 해외에서 일 할 수 있는 회사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어느 봉제 회사에서 방글라데시 또는 베트남 주재원을 뽑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곧바로 지원을 했다. 방글라데시가 네팔과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에 분위기도 비슷할 것이라고 판단한 남편은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베트남이 아닌 방글라데시를 선택했고, 최종합격이 되었다. 베트남과 방글라데시가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나중에 알았다.

가끔,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기도 전에 이미 입이 말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남편의 마지막 면접 때처럼 말이다. 그때 베트남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두고두고 후회를 했다.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본 방글라데시는 네팔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였다. 국교가 힌두교인 네팔과 이슬람교인 방글라데시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네팔에서 겪었던 봉사자들의 활기나 여행자들의 자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방글라데시는 특별한 유물도, 여행할 만한 곳도 없어서 여행을 오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다. 우리 나라에서는 ‘여행 제한국가’로 지정되어 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검은색 부르카로 가리고 다니는 여자들, 천 하나를 허리에 돌돌 말은, 치마같이 생긴 룽기를 입고 다니는 남자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무릎 위로 올라가는 옷을 입으면 안된다는 말에 더운 날에도 항상 긴 청바지와 긴 레깅스를 입고 다녔다. 현지 여성들은 발목 아래까지 긴 옷을 입어야 했지만 그나마 외국인인 우리는 무릎까지 허용이 됐다. 조금이라도 짧은 옷을 입고 나가는 날에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긴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 짧은 바지를 입으면 왠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 중에 네팔과 방글라데시가 비슷한 부분이 몇 개 있다. 바로 언어이다. 두 언어는 모두 빨랫줄에 걸려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숫자도 거의 비슷하다. 네팔어 덕분에 벵골어도 쉽게 익힐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학 선배가 준 기초 벵골어 책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내 머릿속에 박힌 네팔어 때문인지 벵골어가 쉽게 입력되지 않았다.




폐쇄적인 분위기의 방글라데시는 왠지 모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네팔에서 홀로 자유롭게 걸어 다니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슬림에 대한 편견은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들의 커다란 눈동자를 볼 때 마다 뭔가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했다. 어린 아기를 데리고 과연 이곳에서 살 수 있을지, 마음을 잡지 못했다. 수도 없이 많은 질문을 해 보았다.

‘우린, 왜 여기에 왔을까?’

‘왜 여기 있을까?’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을까?’

‘특별한 뭔가 가 있기는 한 걸까?’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던진 모든 질문의 대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날들만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다.


삶은, 항상 우리가 예상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것에 순응하며 살아가느냐, 몸부림치며 반항하며 살아 가느냐의 차이일 뿐.

난 일단 순응하는 쪽을 선택했다. 말도 통하지 않은 이억만리 낯선 나라에서 어린 아기를 데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루하루에 몸을 맡기고 그 삶에 적응되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치타공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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