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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09. 2019

낯선도시, 치타공으로 가는 길

방글라데시와의 첫 만남

2012년 10월의 마지막 날, 가을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나는 곧 떠날 거예요. 그러니 날 보러 오세요.’

가을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손짓하며 가을을 보러 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단풍과 은행잎으로 물든 산은 색 색깔 화려한 옷으로 갈아 입고, 이번주가 마지막이라며 단풍놀이를 하러 오라고 유혹했다. 그것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더 부추기기도 했다. 설악산, 내장산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아직도 도시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냐며,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이제 곧 추위가 몰려올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여유롭게 산으로 들로 여행을 다녀오는데, 나만 아직도 도시의 빌딩 사이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심어주었다.


그런 한국의 가을을 뒤로하고 남편을 따라 방글라데시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해 가을을 마지막으로, 한국의 가을을 만나지 못했다. 단풍도, 은행잎도, 색색의 산들도 그저 한 해 한 해 찾아오던 가을의 당연한 모습들이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닌것이 되었다.




첫째 지안이의 100일 사진을 찍고 일주일 후, 남편은 방글라데시, 치타공이라는 도시에 가서 일을 시작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본 도시였다. 남편이 가기 전, 인터넷으로 아무리 검색을 해 봐도 치타공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단지, 치타공 바닷가에 오래되어 버려진 배를 해체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구슬픈 사연을 담은 다큐멘터리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린,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러니 살림을 많이 사지 말자. 언젠간 한국을 떠나게 될 것 같아.”

결혼 후 15평 빌라에서 살면서 남편은 늘 이 말을 했다. 그래서 컵도 그릇도, 숟가락 조차도 많이 사 놓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 말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한국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남편은 정말 떠나버렸다. 그리고 8개월만에 우리를 데리러 왔다.



8개월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타지에서 혼자 8개월을 지내다 온 남편의 얼굴은 몹시 수척해져 있었다. 남편의 얼굴을 보니 치타공이라는 곳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엔 고뇌와 피곤이 서려 있었다. 원래부터 살집이 없던 남편은 더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지안이는 이 낯선 남자가 누구인지 호기심과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아빠가 없는 기간동안 지안이는 배밀이를 하고, 기고, 앉았다. 엄마인 난, 지안이의 전부가 되어 있었다. 어디를 가나 엄마만 찾고, 엄마의 다리를 붙들고 서있었다.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아기띠를 하고 가야했다. 지안이는 엄마밖에 모르는 엄마 바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둘 만의 공간에 불쑥 들어온 이 낯선 남자가 누구인지, 왜 한 방에서 한 이불을 덥고 자는지, 지안이는 그런 아빠에게 더욱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우릴 보며 함께 놀자 손짓하는 그 가을산을 뒤로하고 낯선 곳으로 향했다. 뒤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엄마 옆의 아빠는 애써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막내딸의 출국을 보기 위해 먼 걸음을 하셨다.



“선량아, 너는 고흥에 내려와서 사는 거 어떻겠냐? 한명이라도 가까이 있으면 좋겄다만. 너 내려오면 아빠가 병원이랑 알아봐 줄게.”

“진짜요. 아빠? 진짜 고흥으로 내려 갈까요?”

“응. 너가 내려온다고 하면 아빠가 어디 일자리는 알아볼 수 있지.”

“생각해볼 게요.”



결혼 전, 아빠는 나에게 시골에 내려와서 같이 살자고 했다. 언니들은 이미 다 결혼을 해서 머나먼 서울에 살고 있었다.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아빠는 시골에 병원도 알아봐 주고, 선자리도 알아봐 준다며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한명이라도 가까운 곳에 붙들어 두고 부모역할을 하고 싶어하셨는데, 그 막내딸이 경상도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더니, 이번엔 더 멀리 가려고 한다

.

그곳은 버스로 한번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비행기 한번만 타면 도착하는 그런 곳도 아니다. 서울보다 더 먼 곳, 말로만 듣던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10개월 지안이와, 아기를 데리고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초보엄마인 난, 머리부터 발 끝까지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손가락이 자꾸 부르르 떨렸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행여나 아이가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울며 보채서 비행기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 했다. 원래부터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끔찍할 정도로 싫어하는 나이다.

비행기 안에서 아이가 조금이라도 칭얼대면 젖을 물렸다. 아이도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계속 젖을 찾고 있었다.

‘엄마, 난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날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이 싫어요. 엄마, 귀가 아파요. 이 이상한 공기와 느낌은 뭐 에요?’

아이의 칭얼거림은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방글라데시 치타공으로 가는 길은
참 멀었다.

 인천공항에서 6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 방콕 공항에서 내린다. 방콕에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방콕 공항 근처의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바로 떠나야 했기에 방콕에 가 보았다라고 말 할 수도 없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방글라데시 “다카”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2시간여의 비행 끝에 드디어 다카 사쟐랄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온 짐을 찾아 카트에 실었다. 그리고 치타공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기위해 이동을 했다. 아이 기저귀, 책, 옷, 온갖 먹을거리들……. 여기서 구할 수 없는 온갖 것들을 이민가방 3개에 가득 넣고, 캐리어 3개에도 가득 넣었다.

 무거운 짐 때문이었는지, 녹이 쓸 데로 쓴 카트 때문이었는지, 남편은 카트를 밀면서 자꾸만 주춤거렸다. 그런 남편의 뒤를 어린 지안이를 안고 졸졸 따라 갔다.



다카는 방글라데시의 수도이고, 치타공은 벵골만 바다와 만나는 방글라데시 제 2의 도시이다. 제 2의 도시이긴 하지만 국제선이 별로 없어서 다카로 먼저 와서 국내선을 타고 다시 이동을 해야 했다. 차로는 7시간, 비행기로는 2시간의 거리이다. 방콕에서 온 시간만큼 더 가야 한다.


다카 공항 국제선에서 국내선으로 이동하는 동안 잠시 공항 바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항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수 많은 사람들이 쇠창살 사이사이에 붙어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티켓이 없는 사람들은 공항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모두들 공항 출입문 밖에 모여 있다. 그 모습은 마치 벌집에 모여 있는 벌떼 같았다. 말로만 듣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하지만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좁은 국내선 대기실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찌릿하고 매캐한 냄새가 여기 저기에서 났다. 어느 시골 시외버스 터미널의 대합실과 매우 흡사한 모습과 향기였다. 그런데, 참고 있던 생리현상이 나타났다.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냥 참아야 하나 망설여졌다. 하지만 생리현상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과 코를 막고 얼른 볼일을 보는 수 밖에…….

냄새나는 이 화장실에서도 지안이는 나와 함께 꼭 붙어 있었다.


내가 당혹스러운 만큼 아이도 몹시 당황스러워 보였다. 난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이 아이에게 왠지 내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았다. 콩닥 거리는 내 심장이 아이의 귀에 천둥 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마음을 가다듬어 보지만, 내 마음과는 다르게 내 심장은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다.

더운 날씨 때문에 빵빵하게 틀어 놓은 에어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분명 더운 날씨인데, 대합실 안은 몹시 추웠다. 미리 준비해둔 가디건을 꺼내 입었다. 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낯선 이방인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의 눈은 마치 사슴 같았다. 커다란 눈과 긴 속눈썹이 그들의 차림새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요리 조리 굴리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국내선 대기실에서 외국인은 우리 세 사람뿐이었다. 이 공간에서 새하얀 피부의 동양 여자와 어린 아기는 가장 눈에 띄는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 공간의 모든 모기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달려드는 모기를 잡기 위해 헛스윙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모기 기피제를 미쳐 준비하지 않은 이 무지한 엄마 때문에 우리는 모기에게 속수무책으로 헌혈을 했다. 모기도 우리가 이방인인 것을 알았나 보다. 처음 맛보는 달콤한 피의 냄새로 그 곳의 모든 모기들이 몰려왔다. 이미 팔과 다리는 얼룩덜룩 해졌다. 열심히 여기 저기를 긁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느꼈다. 살짝 웃음을 머금은 그 사람들의 눈빛이 자꾸 거슬렸다.


드디어 치타공으로 가는 작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국내선의 작은 비행기는 몹시도 흔들렸다. 비행기가 흔들릴 때 마다 심장도 함께 정처없이 흔들리고, 피가 머리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모르겠다. 몹시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두려움도 잠시, 지안이는 다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가슴을 풀어 해치고 이 조그마한 녀석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2시간의 비행시간 내내 지안이는 내 찌찌를 물고 놔주지 않았다. 찌찌를 빠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만 있었다.

드디어 치타공 공항에 도착을 했다. 이제 다 왔나 보다 생각을 했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치타공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데 2시간이 걸렸다. 멀미가 나오려는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아이는 피곤에 지쳐 잠들어 버렸다. 자는 도중에도 계속 내 가슴으로 파고 들곤 했다.

드디어 회사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이미 진 뒤였다. 방글라데시의 시간은 한국보다 3시간이 늦다. 현지 시간으로 저녁 7시였지만, 한국 시간으로는 이미 10시였다.


그제서야 며칠전에 본 남편의 얼굴이 왜 그렇게 고뇌와 피곤에 찌들어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내가 본 남편의 그 고뇌와 피곤이 나에게로 전이되어 있었다.


치타공 공항, 국내선 타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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