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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09. 2019

광야의 생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그곳은 외로움의 광야였다.

남편은 아침6시 반쯤 출근을 하면 저녁 9시가 다 되어 돌아왔다. 대부분의 회사와 공장은 치타공 공항 근처의 공장 단지에 있다. 가족 없이 혼자 와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장 근처 기숙사에서 살고, 우리처럼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매일 2시간씩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 한다.

치타공의 도로는 매우 좁다. 그 좁은 도로에는 중앙선이 없다. 그리고 릭샤(바퀴가 세 개 달린 인력거)와 베이비 가리(CNG라고도 함. 바퀴가 세 개 달린 가스 차)가 가득하다. 역 주행 하는 차들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뭐라고 욕하지 않는다. 그냥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며 지나친다. 도로에는 중앙 선 뿐만 아니라 횡단보도도 없다. 가끔 보이는 신호등은 무용지물이다. 빨간 불과 파란 불이 같이 켜 지기도 하고, 아예 불이 안 켜질 때도 있다. 길을 건너 가려면 자동차, 릭샤, 베이비 가리가 달리는 도로를 가로질러 무단횡단을 해야 한다. 그래서 도로에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도 가득하다.

막히지 않으면 30분만에 도착하는 그 길을 남편은 날마다 2시간씩 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이유도 없이 막히는 그 길은 자동차에서 나오는 매연과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로 가득했다.




아이와 둘이서 하루 종일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이 온다고 해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수 십 번씩 시간을 확인했다. 첫 한달 동안은 인터넷 설치를 못해 인터넷을 아예 하지 못했다. 핸드폰 심카드도 없어 전화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매번 시간을 확인 하는 일뿐이었다. 퇴근해서 들어오는 남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과 먼지, 그리고 고단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난 영어도 벵골어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혼자 외출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외출할 수 있는 날은 금요일, 남편이 쉬는 날이 전부였다. 남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와 지안이는 집안에서 놀다 조금 지루해지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꽃을 따며 놀았다. 손으로 흙을 주무르며 놀기도 했다. 그것도 지루해 지면 땅 바닥에 푹 주저앉아 지나가는 개미들을 보며 놀기도 했다. 그것도 아니면 옆집 집사님이 준 유아 용 자동차에 지안이를 태워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자동차를 끈으로 묶어서 이리 저리 끌고 다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한국과는 다르게 치타공의 아파트는 아파트 단지가 없다. 그저 건물 하나와 주차장이 전부다. 그곳을 빠져나가면 복잡한 도로와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가 바로 나온다. 집 베란다에서 그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았다. 릭샤와 베이비가리, 자동차, 그리고 사람들……. 규칙도 규범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고가 안 나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몇 날 몇일 집에서만 지내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지안이도 한 돌이 돼 가면서 점점 고집이 세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엄마 껌딱지였다. 졸리기만 하면 찌찌를 찾고, 기분이 안 좋으면 엄마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내 가슴을 들춰 대는 이 녀석이 너무 얄미웠다. 가끔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중에 내 가슴을 들추면 나도 모르게 화가 솟구쳤다. 큰 환경변화를 겪은 지안이도 나름의 해결책을 찾는 방법이었는데, 초보 엄마인 난, 그저 내가 힘든 줄만 알지, 애가 힘들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리고 책에 나온 대로 그대로 해야 될 것만 같았다.

시간을 맞추고, 규칙적으로 수유를 해야 한다는 육아 전문가들의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왠지 내가 애를 잘 못 키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을 맞춰서 육아를 하지 않는 일관성 없는 엄마가 바로 나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찌찌를 찾는 아이에게 좋지 않은 말들을 내뱉었다.

“넌 엄마가 있으니 된 거 아니야? 엄마만 있으면 되잖아.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너까지 이렇게 꼭 엄마를 힘들게 해야 되겠어? 그만 좀 울어. 그만 좀.”

아마도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엄마, 나도 많이 힘들어요. 나를 진정시켜 줄 엄마의 찌찌가 필요해요. 나도 그만 울고 싶지만, 울지 않으면 내가 진짜 안 힘들다고 생각할게 아니에요.’





이곳에 온 지 한달 즈음, 남편은 지안이의 돌잔치를 하자고 했다. 그것도 집에서 회사사람들과 교회 사람들을 초대해서 하자고 했다. 네팔에서 즐겁게 교회생활을 했던 남편은 치타공 한인교회가 서로 좀더 가까워지고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지안이 돌잔치를 통해 교회 사람들과의 교제의 장을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난, 남편의 그 제안이 너무나도 부담이 됐다. 치타공에 온 지 겨우 한 달이 된 새댁이 할 수 있는 음식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리고 회사 분들과 교회 분들을 모두 합치면, 그 수가 상당히 많아졌다. 나는 회사 분들만 초대하든지, 식당에서 하는 것을 제안했지만 남편의 생각은 완고했다.

남편은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때 자주 “신앙”을 들이댄다. 본인의 생각은 신앙에 합당한 것이고, 나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곤 한다. 뭔가를 결정할 때 감정이 아닌, 신앙의 잣대를 갔다 대면, 난 항상 지고 만다. 그럴 때 마다 난 기분이 나빠져서 결국 싸움이 되곤 했다. 내 힘든 감정을 알아주기를 바랬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서툰 부부였다.

 

남편의 신앙과 믿음생활은 항상 한결같다. 가끔 게을러 지기도 하지만 다시 자신의 믿음생활로 돌아가 있곤 한다. 그런 남편이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은 상황에 이르자 나의 감정은 폭발을 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남편이 얄미웠다. 하지만 난, 싫어도 결국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편은 옳은 말만 했다. 그리고 난 미움 받을 용기가 없었다.


결국, 남편의 뜻대로 집에서 돌잔치를 하게 되었다. 회사분들 6명과 교회분들 약 30명을 모시고 조촐하게 돌잔치를 했다. 아이들까지 합하면 40명이 넘는 수였다. 집에는 신혼 때 산 숟가락 2개, 젓가락 2개가 다였다. 옆집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빌렸다. 생에 처음으로 많은 양의 음식을 해보았다. 그곳에는 한인 식당도 한인 마트도 없었다. 모두 직접 만들어야 했다. 돌 잔치 시간은 저녁이었지만, 초보 주부의 실력으로는 아침부터 요리를 시작해야 했다. 김밥, 잡채, 간장치킨, 골뱅이 무침, 샐러드, 불고기, 그리고 몇 가지 더 음식을 해서 뷔페로 내놓았다. 이 날을 위해 요거트를 만들고 식혜를 만들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멋도 모르고 40인분의 음식을 준비해서 돌잔치를 치러냈다. 지금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일이었다.


우리도 여느 부부와 마찬가지로 한번씩 부부싸움을 했다. 부부싸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난 싸우는 것에 감정을 소모하는 일을 너무나 싫어했다.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큰 나는 결혼하면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우리의 싸움은 연애때부터 시작되었다. 달콤한 연애 초기가 지나자 마자 싸우기 시작했다. 주말 오후, 신도림역에서 큰소리로 싸우기도 하고, 횡단보도 위에서 싸우고 그냥 집에 가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며칠씩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신경전을 벌였다. 한국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싸우면 혼자 걸어 다니거나, 좋은 카페에 가서 앉아있거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풀 수가 있었다. 하지만 치타공에서는 부부싸움을 해도 어디 하소연할 곳도, 애를 맡기고 나갔다 올 곳도 없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한번씩 전화를 해 대화를 하곤 했는데, 부부싸움을 하면 그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부부싸움을 하고 난 다음 날, 출근하는 남편의 얼굴도 보지 않고 누워있었다. 남편도 간다는 말없이 나가 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냉랭한 공기는 이틀이 지나도록 데워지지 않았다. 낮에 아이와 집에 있는데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왔다.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남편뿐이었는데 그 마저도 할 수가 없어 숨이 막혔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와 혀 짧은 소리로 하는 대화는 일방적인 의사소통일 뿐이었다. 남편만 믿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에 왔는데, 그런 남편이 싸웠다는 이유로 나에게 말도 하지 않는 이 상황이 미칠 것 같았다. 눈에서 닭 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만 흘렸으면 좋았으련만, 입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괴성이 흘러나왔다. 지안이는 엄마의 눈물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엄마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무치도록 외로웠다. 땅 속으로 꺼질 것 같은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 외로움과 서러움은 서로 얼키고 설켜 실뭉치를 만들어 냈다. 그 실은 이내 나를 칭칭 휘감았다. 그리고 내 몸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정신은 혼미해지고, 눈으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엄마, 엄마”

나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를 휘감고 있던 실이 투둑 끊어졌다. 지안이는 울고 있는 엄마의 가슴으로 파고들어와 나 좀 봐 달라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깊은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매우 사소한 말다툼이었을 것이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된 부부싸움은 감정의 찌꺼기가 모이고 모여 어느새 커다란 풍선을 만들어 냈다. 그대로 둔다면 분명 ‘뻥’ 터질게 분명했다. 감정의 찌꺼기로 불어넣은 풍선이 터지기 전에 바람을 빼 내야했다. 나를 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핸드폰을 들고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난 여기서 대화할 사람이 자기 밖에 없는데, 이렇게 조금 싸웠다고 말도 안하고, 그러면 난 살수가 없어. 싸우더라도 말은 좀 하고 살자. 나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진심을 담아 고백을 했다. 나의 힘듦이 느껴졌는지, 본인도 힘들었던 것인지, 우리의 싸움은 이렇게 끝이 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결혼한지 9년차이다. 이제는 감정의 찌꺼기를 모아 풍선을 불지 않는다. 조금 불었다가도 이내 바람을 빼버린다. 서로 솔직하게 감정을 말하고, 공감해줄 때, 더이상 싸움이 되지 않는다. 대신 그동안 쌓인 신뢰와 이해로 풍선을 분다. 적당한 이해와 신뢰는 우리들 감정의 풍선이 하늘로 날아오르게 만든다. 그리고 함께 광야의 길을 걸으며 동지애가 추가되었다.


나의 첫 치타공 생활은 광야 같았다. 마실 물도, 먹을 것도 없이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었던 그들처럼, 나 또한 의지할 분은 그분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먹이시고 보호해 주고 계셨다.


그 시간들은 나의 나약함과 무지함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기도 했고, 외로움에 눈물 흘리고, 다시 일어서고를 반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CNG(베이비 가리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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