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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09. 2019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첫 아이에게는 언제나 미안함과 애틋함이 있다.

지안이는 유난히도 많이 울었다. 목소리도 굉장히 컸다. 난 내 아이는 나를 닮아 순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건 나의 착각이었음을 뒤 늦게 알게 되었다.




허니문 베이비로 갖게 된 아기는 크리스마스가 이틀 지난, 27일에 태어났다. 그것도 3.9킬로그램으로 태어났다. 원래 예정일은 1월1일이었다. 첫 아이는 조금 늦게 태어난다고들 했기 때문에 모든 육아용품을 다음 해로 맞춰 준비했다. 다음 해가 바로 ‘용’의 해였다. 그런데 아기가 너무 컸다. 첫아기가 너무 크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며칠 더 있으면 4킬로그램이 넘을 것이고, 그러면 자연분만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뭘 많이 먹는 것도 아니었고,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아기가 크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작은 메디컬NGO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날마다 1시간씩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했다. 버스 한번에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야 했다. 일주일에 2번씩 파주, 동두천, 일산등으로 무료 이동진료를 다녔다. 진료를 가면 진료실을 방문한 사람들의 기초 혈압을 측정하고, 처방에 맞게 약을 조제해서 드리고 설명하는 일을 했다. 배가 남산만 하게 불러서도 그 일을 계속 했다. 내가 좋아하던 일이라 놓을 수가 없었다. 임신 8개월이 되자 배는 더 불러왔다. 그 때부터 분만휴가를 쓰고 집에서 운동을 했다. 빌라 4층에 살고 있던 난 4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며 운동을 했다. 그래도 아이는 계속 커 갔다. 어쩔 수 없이 해를 넘기지 않고 아기를 낳기로 했다. 결국 지안이는 용띠가 아닌, 토끼 띠가 되었다.


아이를 낳고 하루만에 5 킬로가 빠졌다. 막 낳은 아이를 안고 있으니 아이가 유난히 컸다. 다른 신생아들에 비해 두 배는 되 보였다. 이렇게 큰 아기가 내 아기가 맞는지 뭔가 괴리감이 느껴졌다. 튼튼하게 태어난 지안이는 울음소리도 유독 컸다.

젖은 또 넘치도록 흘러나왔다. 초산임에도 불구하고 모유가 넘쳐 흘렀다. 모유 팩에 담아 둔 모유가 너무 많아 한번씩 버리곤 했다. 모유량이 너무 많은 나머지 젖몸살이 몇 번이나 찾아와 고생을 했다.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10명도 거뜬히 낳았을 몸인가 보다. 자궁도, 가슴도 아기를 낳고 키우기에 최적화된 몸이었다. 하지만 정신만은 아니었다.


난 모든 아기들이 잘 자고 잘 먹는 줄 알았다. 때에 맞춰 우유를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재우고, 좀 놀아주면 되는 줄 알았다. 어떻게 내 아기를 보살피고, 배려해야 하는 지 몰랐다. 모든 여자가 아기를 낳는 그 순간부터 저절로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엄마 아빠도, 엄마 아빠가 되기 전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너무 뒤 늦게 알았다.




내가 첫 아기를 낳아 키울 때 가장 유행했던 책은 “베이비 위스퍼”였다. 너무나도 잘 울던 내 아기도 그 책대로만 하면 순한 어린 양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의 가장 큰 실수는, 내 아기의 기질과 내 아기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무시했던 것이었다. 뭐든지 예민하게 반응하고 엄마만 찾고 울기만 하는 아기를 보며,

“난 그러지 않았는데 넌 왜 그러니……, 다른 아기들은 안 그러는데 도대체 넌 왜 그러니……”

하며 원망 섞인 말을 했다.

이렇게 원망을 하는 대신 예민한 아이임을 받아들이고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를 줄이고,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충분히 설명하고, 아이가 힘들어 할 때 마다 그 아이의 감정을 충분히 받아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되지 않았다. 아이의 기질도, 아이의 욕구도 내 중심에서 생각하고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육아서적도 무조건 맹목적으로 따라 하는게 아니라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고, 나에게 맞는 내용인지 충분히 생각해보고 적용하는 것이 맞는 것이었다. 하지만 초보 엄마였던 난, 맹목적으로 육아 서적에 매달렸다. 하지만 책 대로 했는데도 아이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잘 울었다. 가끔은 하루 종일 울기도 했다. 결국 육아서적을 던져 버렸다.


치타공에서의 내 육아는, 말 그대로 내 감정이 우선인, 내 맘대로 육아였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힘들어 하는 아이에게 제발 떨어지라고 밀어냈다. 엄마 찌찌만 찾는 아이에게 돌이 지나자 강제로 모유를 끊어버렸다. 바나나를 바닥에 던졌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제대로 된 훈육이 필요하다며 아이를 잡았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세워놓고 혼내고 또 혼내고……. 내 힘든 감정이 앞서서 아이의 눈빛을 읽지 못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데, 난 그저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저 하루하루 견디며 지냈다. 목적도 없이 하루를 보냈다. 나도 이곳이 처음이라 힘들었다. 엄마도 엄마 역할이 처음이라 실수투성이었다.



지안이가 16개월이 되었을 때, 함께 집에서 놀고 있었다. 난 둘째를 가져서 배가 살짝 나와 있었다. 지안이는 소파 위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놀고 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소파 아래로 머리부터 떨어졌다. 내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잡지 못했다. 아이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윗입술 한쪽이 완전히 찢어져 있었다. 남편은 회사에 가고 없었다. 어서 빨리 병원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난 자동차도, 아는 병원도 없었다. 아이의 입술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내려 아이의 옷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집에 있던 거즈로 입술을 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즈가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아이는 통곡을 하며 울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집사님께 도움을 청했다. 겨우 겨우 차를 얻어 타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로 갔다가 바로 처치실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입술을 꿰맨다고 했다. 난 울부짖는 지안이를 붙들어야 했다. 지안이의 두 눈동자는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날 애처롭게 쳐다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작은 입술에 바늘이 들어갈 때 지안이는 목이 터져라 울부짖으며 엄마를 불렀다.

“지안아 괜찮아. 엄마 있어. 엄마가 옆에 있어. 많이 아프지? 엄마가 옆에 있어.”

“지안아 한번만 참자. 우리 지안이 잘하네. 엄마 여기 있어.”

지안이의 입술을 꿰매는 동안 아이가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두려움에 흔들리는 아이의 눈을 마주 보며 계속 이야기를 해주어야 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계속 말해 주었다.

그렇게 네 바늘을 꿰맸다. 아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쉬어서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뒤늦게 도착한 남편을 보자 마자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옆에 있었는데, 내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아이에게는 괜찮다고 했지만, 난 괜찮지가 않았다. 아이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이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붙잡지 못했다. 아이가 위험하게 놀고 있었는데도 그걸 몰랐다. 남편은 아무런 말없이 축 쳐진 지안이를 받아 안았다. 집에 와서 배고픈 아이에게 맑은 죽을 만들어 먹였다. 지칠 대로 지친 지안이는 조금 받아먹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지안이의 상처가 다시 붙어 실밥을 뺄 때까지 덧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상처에 음식물이 들어갈까 노심초사 걱정을 했다. 겨우 꿰매 놓은 입술이 다시 터질까 봐 애간장을 태웠다. 다행히도 상처는 잘 아물어 갈라진 입술이 잘 붙었다. 하지만 흉터는 아직도 남아있다. 지금도 남아있는 아이의 입술 상처를 보면 너무 미안해진다.


해외에 살 때 가장 힘든 것이 아이가 아플 때이다. 아이가 열이 펄펄 나서 병원에 가도 특별한 조치를 취해주지 않는다. 그저 독한 항생제와 해열제를 처방해주는 것이 다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이가 열이 나면 알아서 해열제를 사다 먹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학 지식으로 약을 먹였다. 소아과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내 지식으로 안되는 질환들이 있다. 그럴 때는 방글라데시에서 봉사하고 계신 한국 의사선생님들을 찾아가 진찰을 받았다.

한국처럼 아이가 아프면 동네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바로 옆 약국에서 약을 타고, 약국에서 주는 사탕 몇 봉지가 그렇게 그리웠다. 그런 일상적인 삶이 너무 부러웠다. 휴가 때 한국에 가면 약국에 가서 모든 약을 싹쓸이하다시피 사왔다. 종합 감기약부터 대일밴드. 콧물 감기약, 기침 감기약, 해열제는 물론이고 화상 거즈에 듀오 덤, 각종 연고까지 사오곤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약병을 여러 병 얻어 왔다. 한국에서 흔한 약병이 방글라데시에서는 구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나마 전문지식이 있는 간호사 출신 엄마의 가족에 대한 사랑 표현이었다.


엄마에게 첫 아이는 항상 애틋하면서도 미안한 존재이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실수를 많이 하곤 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난 뒤 에야 그때 그게 별일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대상이 항상 첫 아이이다.


첫 아이를 데리고 첫 해외생활을 하면서 난 아이에게 항상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엄마의 죄책감이 아이에게 가장 독이라는 글을 보았다. 그 죄책감으로 인해 아이에게 항상 친절하게 잘 해주는 것이 아니라, 좋을 때는 엄청 좋은 엄마였다가, 힘들 때는 엄청 무서운 엄마였다가, 전혀 일관성이 없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바로 나였다. 머리로는 알겠지만, 행동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이에게 책을 많이 읽어 주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만 되면 아이가 책을 들고 왔다. 책을 한권, 두 권 읽어 줘도 아이는 “또” 를 외쳤다. 이제 그만 잤으면 좋겠는데 잠 잘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책을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얼른 자지 못해~”


아이가 낮잠 잘 시간인데 자지는 않고 칭얼 대기만 했다. 안아도 보고, 업어도 보지만 자지 않는다. 급기야 대성 통곡을 하고 운다. 도대체 뭘 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졸린 것 같은데 자지 않고 울기만 한다. 결국 아이를 이불 위에 내팽개쳤다.

난 씩씩거리며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이는 그런 엄마를 따라 울며 기어 나왔다. 너와 나의 줄다리기 같은 싸움이 또 시작됐다. 자기 싫은 아이와 빨리 자라는 엄마 사이의 평행선 같은 줄다리기는 날마다 계속됐다.


‘나는 왜 끝까지 참지 못하고 폭발을 하고 말까? 나는 왜 좀더 부드럽게 아이에게 다가가지 못할까? 왜 난 결국 무책임 하게 집어 던지는 것일까?’

그게 책이던, 내 아이이던 상관없이 끝까지 붙들고 있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내 마음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은 죄책감뿐었이다. 이놈의 죄책감…….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해야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엄마인 내가 엄마 같지 않고 악마처럼 느껴질 때,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죄책감이 엄습한다. 이제 그만 나도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도 좋은 엄마이고 싶었다.


치타공에서 지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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