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체스를 통한 몰입의 경험
한국에 방과 후 수업이 있듯이 국제 학교에도 방과 후 액티비티가 있어요.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델리 프랑스 학교에서는 9월에 액티비티를 신청했어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원하는 수업을 신청할 수 있는데요, 발레, 태권도, 축구, 발리우드 댄스, 아트 등. 다양한 수업을 신청할 수 있어요.
대부분 예체능 위주지만, 영어나 프랑스어가 약한 아이들을 위한 영어, 프랑스어 반도 있어요. 이 시간에는 아이들의 영어, 프랑스어 숙제를 도와준답니다.
저도 다른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에게는 태권도나 축구를, 딸에게는 발레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어요. 그런데 싫대요. 그래서 고민 끝에 아들은 체스 수업을, 딸은 재활용 아트(recycling art)를 신청했답니다.
체스를 선택한 이유는, 바둑처럼 차분히 앉아서 게임을 하다 보면 집중력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약간 했기 때문이고요, 둘째가 재활용 아트를 선택한 이유는, 평소에도 그림 그리는 것보다 만들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어요.
드디어 지난주에 첫 방과 후 액티비티를 하고 왔어요. 둘째 딸아이는, 신문을 좍좍 찢어 붙여서 만든 고양이를 들고 왔더군요. 음..... 그렇게 멋지진 않았어요. 그런데 아이는 너무 즐거워하더군요. 재미있었대요.
첫째 아들아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체스를 사달래요. 너무 재미있었다면서요. 집에 가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 체스를 사주었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체스판을 펼쳐놓고 함께 하자고 하는데, 전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몰랐어요.. 그런데 아이가 엄마랑 꼭 하고 싶대요. 학교에서 배운 규칙을 엄마한테 가르쳐 주겠다면서요.
마주 앉아 체스판과 말을 노려보며 아들에게 체스를 배웠습니다.
꽤 어렵더군요. 각 말마다 역할이 달라서 모두 외우고 있어야 해요. 계속 생각하면서 어떻게 상대편 말을 잡을지 머리를 굴려야 해요.
사실 바둑도 못하고, 장기도 못하고, 고도리도 잘 못합니다. 자꾸 규칙을 잊어버려 아이에게 계속 물어보았어요. 결국, 아이에게 두 번 지고 한번 이겼어요. 하다 보니 재미있었어요. 은근히 승부욕도 생기고요.
아이가 뿌듯해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엄마 마음도 산들산들 해졌어요. 아이는 벌써부터 다음 액티비티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에 빠지면 푸~욱 빠지는 아이는, 체스 상자를 보물처럼 들고 다녀요. 체스판을 펼쳐놓고 혼자 하기도 하고, 동생과 함께 앉아서 체스도 뭣도 아닌, 이상한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고 푹 빠져서 허우적대는 경험은, 지루하고 허무한 일상에 만족감과 기쁨을 동시에 주는 소중한 시간인 것 같아요. 이게 바로, 몰입의 시간이겠죠.
체스를 한다고 해서 금방 집중력이 향상되거나, 머리가 좋아지거나 하진 않겠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경험인 것 같습니다.
브런치에 날마다 글을 쓰더라도 글쓰기 실력이 확~ 늘진 않지만,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요.
아이는 이제 출장 간 아빠를 기다리고 있어요. 엄마는 자꾸 한 번만 하고 안 해주고, 동생은 자꾸 규칙을 안 지키고.......
이제 아빠가 오면, 아빠에게 체스 규칙을 하나하나 알려주겠죠. 그리고 분명 또 한 번 뿌듯해할 거예요. 이런 경험이 아이의 자존감을 더 단단히 만들어 줄거라 믿습니다.
꼭 축구를 해서 이겨야지만이, 태권도를 해서 검은띠를 따야지만이 자존감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아주 사소한 일상 속에서 아이가 엄마에게 가르쳐주고, 함께 게임을 하는 경험. 이런 것도 분명 차곡차곡 쌓여서 아이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 줄 거예요.
(언젠가는 운동도 좀 좋아해줬으면 좋겠어요. 축구는 좋아하는데, 축구 클래스는 싫어하는 이유가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