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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0. 2019

둘째를 출산하다.

남편없이 4kg의 딸을 출산했다.


임신 8개월이 되어 잠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둘째를 출산하기 위해서였다. 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힘들었다. 첫 임신때와 마찬가지로 배가 어마어마하게 나와있었다. 무거운 몸으로 19개월 된 지안이를 밤새 안고 있었다. 지안이는 비행기에서 자는 것이 불안하고 불편했는지 편히 자지 못하고 계속 내 무릎에 있고 싶어했다. 남편은 이미 쿨쿨 자고 있었다. 배가 뭉치고 밑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견뎌야 했다. 잠만 자던 남편이 몹시도 얄미웠다.

서울 언니집에 도착하니 언니들과 조카들이 우리를 보려고 다 모여 있었다. 밤새 잠을 자지 않아 피곤했지만 언니들과 너무 놀고 싶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걸어 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조카들을 데리고 체험관에 간다는 언니들을 따라 나섰다. 몸이 힘들어 쉬고 싶은 욕구 보다도 자유를 만끽하며 돌아다니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던 것이다.

며칠 뒤 남편은 나와 지안이를 서울에 남겨두고 홀로 치타공으로 돌아갔다.

어린시절, 나 대신 동시를 써주었던 사촌 언니는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다. 난 사촌 언니네 병원에서 둘째를 낳기로 결정했다.

둘째도 첫째만큼 컸다.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뱃속의 아이는 무럭무럭 커갔다. 아이가 너무 커서 분만이 힘들어 질까 봐 날마다 운동을 했다. 뜨거운 여름, 지안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근처 아파트 단지를 뱅글뱅글 돌며 걸어 다녔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 바람이 불어오던 9월 말, 사촌언니가 일하는 병원으로 향했다.

사촌언니는 무통주사를 놔주었다. 3.9킬로였던 첫째아이를 무통주사 없이 낳으면서 너무 고생을 했었는데 이번엔 무통주사를 맞으니 천국 같았다. 4킬로가 넘은 엄청 거대한 딸을 낳았다. 막 태어난 둘째는 전혀 신생아처럼 보이지 않았다.


남편없이 둘째를 낳고, 이틀만에 퇴원을 해 큰언니 집으로 갔다. 병원에서 지내는 이틀 동안 지안이와 처음으로 떨어져서 지냈다. 지안이가 너무 힘들까 봐 조리원에도 가지 않았다. 큰언니집의 작은 방안에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눕혀 놓고, 지안이를 돌봤다.

큰언니는 나에게 친정 엄마 보다도 더 많은 것을 해주었다. 미역국을 매 끼니 때마다 끓여주고, 지안이를 데리고 놀이터에도 가주고,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돌봐 주기도 했다. 언니에게는 이미 다 큰 3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북적 거리는 집에 신세를 지게 되어 언니에게도 형부에게도 너무 죄송했지만, 친정인 시골로 가기가 너무 싫었다. 엄마, 아빠 보다도 언니와 함께 있는 것이 마음이 훨씬 더 편했다. 큰언니는 나에게 엄마 같은 존재였다.

지안이는 밤에 잠드는 것을 여전히 싫어했다. 21개월에 오빠가 된 지안이는 아마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지안아, 이제 자야 해.”

“엄마 책”

“그럼 하나만 더 읽고 잘 거야.”

“응. 하나만.”

하지만 절대 책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엄마. 책…….”

“아니야. 이제 진짜 자야 되. 엄마 피곤하고 힘들어.”

“시어. 책~”

“아니야. 이제 자야 해. 이제 책 끝이야.”

“시어. 시어. 시어~~”

“안된다고 했지. 엄마 힘들다고. 얼른 누워.”

“시어.”

결국 아이 등짝으로 손이 올라가고 말았다.

12시가 다 되도록 자지 않고 책을 읽어 달라는 아이에게 화를 쏟아냈다. 날마다 울며 잠든 아이 옆에서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했다. 푸름이 부모님의 ‘배려 깊은 사랑’은 이미 잊혀 진지 오래였다. 배려도 내가 덜 힘들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밤 새 잠을 못 자고 신생아를 돌보다가 낮에는 지안이를 돌봐야 했다.

“엄마 차지하려고 책 읽어 달라고 하는 거야. 진짜 책을 읽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러다 애 버릇 잘못 들면 평생 후 한다.”

“일찍 자야 키가 크지. 애들은 10시에는 자야 지. 엄마가 좀 무섭게 해봐.”

“너가 그렇게 다 받아주니까 애가 더 저러는 거야.”

주위의 이런 말들은 위로가 되기는커녕 내 마음을 더 옥죄기만 했다. 모두 잘못 버릇을 들여서 라고 했다. 애를 기관에 맡기지 않고 엄마가 끼고 살아서 사회성이 없다고들 했다.


책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가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엄마는 힘들다며 도망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너보다도 엄마가 더 힘들다며 하소연을 했다.

지나고 보니 이 시간이 너무 후회가 된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아이가 책의 바다에 퐁당 빠질 시기였는데 난 그저 내가 힘들다며 아이에게 모진 말을 퍼부었다.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기 전에 내 아이가 엄마에게 하는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 눈빛을 읽어주었어야 했다. 21개월에 오빠가 된 아이에게 말이다.


둘째가 90일 즈음 되었던 추운 겨울, 남편은 우리를 데리러 왔다. 아빠와 딸의 첫 만남이었다. 남편이 한국에 잠시 왔을 때, 형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아버님이 아파서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딸을 만난 기쁨도 잠시, 남편은 아버님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그리고 아버님은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다.

두 아들을 모두 장가보내고 이제 편히 쉴 일만 남았었는데 덜컥 암에 걸린 것이다. 그것도 뼈로 전이가 된 뒤였다. 우린 형님 네에게 아버님을 맡기고 다시 치타공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리가 선택한 이 길이 맞는 길인지, 무엇을 위해 우리는 그 나라로 다시 돌아가는지, 수 많은 질문을 다시 해보았다.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어디에도 대답은 없었다. 아픈 아버지를 두고 타지로 가야했던 남편의 어깨는 축 쳐져 있었다. 굳게 다문 입에선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의 흐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촉촉히 젖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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