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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0. 2019

주어진 삶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지나고 보니 추억이 되었다.

힘들기만 할 것 같았던 치타공에서의 삶이 점점 익숙해져 갔다. 둘째를 임신해서 배가 불룩 나온 난 지안이를 안고, 업고, 손을 잡고, 유모차를 끌고 집 주위를 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간호대학 선배가 보내준 벵골어 책을 보면서 공부했다. 포스트잇에 적어서 여기저기 붙여 놓고 단어를 외웠다. 아이가 자는 시간에는 글자를 익혔다. 간단한 대화가 가능해지기 시작하자 근처 과일가게까지 혼자 갈 수 있게 되었다. 제일 가까운 과일가게 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가야 했다. 지안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그 길을 뒤뚱거리며 걸어 다녔다. 그 길에는 사람들과 까마귀로 가득했다. 방글라데시에는 참새보다 까마귀가 더 많다.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는 곳에는 수 십 마리의 까마귀가 모여 있었다. 이제 그런 모습도 익숙해졌다. 유모차를 처음 본 사람들은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우리를 쳐다보곤 했다. 그 중에는 아는 척하며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끔 어떻게 알았는지 “안녕하세요.” 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니하오” 하고 지나간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눈이 원래 크고 그윽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난 더 이상 그들이 무섭지 않았다. 

5월이면 리치와 망고가 나오기 시작한다. 리치는 5월에 나왔다가 6월에 들어가기 때문에 있을 때 많이 사서 냉동고에 얼려 두어야 한다. 그러면 겨울까지 두고두고 냉동 리치를 먹을 수 있었다. 한국의 뷔페집에서 나오는 리치와는 맛이 확연히 틀리다. 탱글탱글한 알맹이에는 과즙이 가득 들어있다. 가끔 꼭지 부분에서 작은 애벌레가 나오곤 했다. 하지만 그 애벌레도 우리의 리치 사랑을 가로막지 못했다. 

망고 또한 너무 맛있어서 날마다 사다 놓고 지안이와 둘이 앉아 그 자리에서 2킬로씩 먹어 치웠다. 리치와 망고 맛에 중독되어 날마다 과일가게를 들락거렸다. 하도 자주 가서 단골 과일가게도 생겼다. 과일 가격을 흥정하는 대범함도 생겼다. 대범함은 점점 늘어났다. 혼자 아이를 데리고 릭샤를 타고 근처 슈퍼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엄청 걱정했다. 가끔 릭샤 바퀴가 터져 뒤집히기도 하고, 자동차와 부딪혀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것이 너무나 답답하고 남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이 너무 싫었다. 처음이 어렵지 한 두 번 계속 하다 보면 그것도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난 CNG를 타고 좀 더 멀리까지 가보기도 했다. CNG는 바퀴가 세 개 달린 가스차를 말한다. CNG나 릭샤를 타고 슈퍼도 가고, 지안이 장난감도 사러 가고, 옷도 사러 다니기 시작했다. 여전히 두려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 곳 생활에 적응해 갔다. 밖에 나가기 전에는 꼭 기도를 하고 나갔다. 릭샤를 타거나 CNG를 타면 가는 내내 맘속으로 기도를 했다. 그러면 왠지 마음이 평안 해져 어디든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집 근처에는 나무들에 둘러 쌓인 공터가 하나 있었다. 그 곳에서는 현지 아이들이 크리켓을 하며 놀았다. 아이들은 항상 흙이 가득 묻은 맨발로 뛰어다니며 크리켓을 했다. 그 숲 속 옆에는 서민들이 사는 집이 있었다. 대문 사이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작은 새간 살이에서 그들의 고단한 모습을 엿보았다. 

‘저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좋은 옷, 좋은 신발, 좋은 집으로 보이겠구나…….’

그 모습들을 보며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종종 마실 물과 모기 약, 장난감 등을 챙겨서 그곳으로 소풍을 갔다. 모래와 흙, 나무와 돌멩이가 있었다. 지안이는 항상 새로운 곳에 가면 관찰을 한다. 관찰하는 시간이 짧을 때도 있지만 이렇게 현지 아이들이 많은 곳은 그 시간이 길어 지기도 한다. 아무도 우리 노는 것을 신경 쓰지 않지만, 지안이는 혹시나 누가 자기 장난감을 빼앗아 가지는 않을지 걱정을 하며 선뜻 놀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도 점점 그곳에 적응을 해 나갔다. 변변한 놀이터가 없었던 우리는 그곳에 앉아 반짝이는 돌멩이를 줍고, 땅을 파고, 모래 위에서 자동차 놀이를 하며 놀았다. 나중에는 땅바닥에 주저 앉아 모래를 뿌리며 놀았다. 우리 지안이는 그런 아이였다. 그곳이 안전한 곳인지 확인을 하고,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그 뒤론 잘 놀았다. 하지만 해가 기울어지면 모기가 너무 많아져서 더 이상 놀 수가 없게 된다. 그곳의 모기들은 하루살이처럼 몰려 다녔다. 아무리 모기 기피제를 뿌려도 모기들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참 다행인 것은 그렇게 모기에 물렸는데도 뎅기 열이나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뎅기 모기에 물려서 고열에 시달리고, 며칠씩 병원에 입 원한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집에서는 아이와 책을 가지고 놀았다. 지안이는 특히 자동차 장난감과 자동차 책을 좋아했다. 자동차책을 읽어주고, 그 책을 새워서 터널을 만들어 자동차 놀이를 했다. 그러다 지치면 밀가루, 국수, 콩으로 놀게 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적응하며 지냈지만 날마다 힘든 게 한가지 있었다. 바로 저녁 준비였다. 남편은 새벽에 나가 저녁에나 돌아왔다. 그래서 아침과 점심은 지안이와 둘이 대충 먹었다. 모유를 끊고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국 하나에 밥을 말아먹는 게 일이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하게 돌아올 남편을 위해 저녁을 준비해야 했다. 치타공은 현지 슈퍼밖에 없다. 가끔 양파링이나 새우깡이 슈퍼에서 보이는 날이면 불티나게 팔렸다. 소고기는 구할 수 있었지만 너무 질기고 비린내가 났다. 그래서 제일 만만한 닭고기를 많이 사다 먹었다. 닭튀김, 치킨가스, 닭 가슴살 구이, 닭백숙………. 나중에는 닭곰탕과 닭개장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요리솜씨가 별로 없었던 난 저녁 준비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인터넷을 뒤지고, 요리책을 뒤져서 요리를 했다. 밥 하나에 메인 요리 하나만 놓고 먹는게 일이었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부엌에 들어가면 지안이는 그때를 너무 싫어했다. 요리하려고 서있는 내 다리를 붙들고 함께 서있었다. 조용히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싶었지만 지안이는 그런 날 가만히 두질 않았다. 그래서 부엌의 온 갓 그릇과 음식물들을 바닥에 펼쳐 놓고 놀도록 했다. 그것도 길어야 10분이었다. 아이는 또 징징대며 나에게 들러붙었다. 결국 뽀로로를 틀어주고 말았다. 


봄이 오기 전, 어느 날 집사님들은 김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난 한번도 김치를 담가본 적이 없었다. 

“선양씨, 내가 배추 사다 줄 테니 한번 해봐요. 내가 도와 줄게”

“아니요. 그냥 김치 안 먹고 살래요. 도저히 못하겠어요. 어떻게 하는 지도 모르고요”

“김치 없이 어떻게 살아요? 괜찮아. 처음엔 다 어려워요. 한번 해보면 감이 와요. 나 이미 두번이나 했는 걸?”

“그럼…. 조금만 해볼까요? 한……다섯 포기?”

“에이, 너무 적어. 열 포기는 해야지. 해 놓고 나면 얼마다 뿌듯한데.”

배추는 일반 마트에서 팔지 않았다. 현지인들이 주로 가는 재래시장으로 가야 했다. 옆 건물에 살던 지현씨는 재래시장에 가서 배추와 무, 다른 재료들까지 사다 주었다. 나와 나이는 같았지만, 이미 치타공에 산지 3년차인 베테랑 주부였다. 지현씨도 차가 없어 항상 릭샤나 CNG를 타고 다녔다. 

배추를 자르고 소금에 절이는 방법도 몰랐던 나에게 지현씨는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배추 10포기를 자르고 소금에 절이고 소금물에 푹 담가 두었다. 굵은 소금이 없어서 현지 소금을 사용했다. 양념을 만드는데 멸치액젖을 거의 한통을 넣어버렸다. 그 말을 듣고 지현씨는 놀라서 달려왔다. 다행히 찹쌀 풀을 넣지 않은 상태였다. 찹쌀 풀을 좀 더 많이 넣어서 간을 맞추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만들었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과 함께 절여진 배추에 양념을 발랐다. 우리의 첫 김장이었다. 김치 없이도 산다던 남편은 김치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 

지금은 인터넷을 찾아 보지도 않고 김치를 담그고 깍두기도 담그고 열무 김치도 담글 수 있게 되었다. 처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긴장되고 힘든 순간이다. 그 처음이 지나고 나면 경험이 된다. 그 경험이 쌓여서 추억이 된다. 남편과 함께 앉아서 잘 절여진 배추에 김치소를 발랐던 초보 주부의 모습이 지금은 추억이 되었다. 


지난 겨울, 20포기의 김장을 했다. 도와주겠다는 남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신 동네 친구들 몇 명이 찾아와 함께 김장을 했다. 방글라데시에 살면서 총 4번의 김장을 했는데, 지난 해 김치가 가장 맛있게 잘되었다. 김장을 할 때 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억이 안 나서 인터넷을 찾아보고, 엄마에게 전화해 물어보곤 했다. 이제는 경험이 쌓여서 대충 재료를 넣고 버무려 먹는다. 야채와 재료가 풍족하면 풍족한데로, 재료가 없으면 없는 데로 그렇게 먹고 살아간다. 


작년 여름, 다카를 떠나면서 남아있던 두 통의 김치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왔다. 맛있게 잘 익은 그 김치가 오늘따라 그립다. 

새롭게 온 이곳에는 배추가 많지 않다. 재래시장에 가면 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직 그 정도의 내공이 쌓이지 않았다. 그래서 배추를 한 포기씩 사다가 겉절이를 해먹고 있다. 김치가 전혀 없어 먹지 못했던 시간들도 있었기에 밍밍한 겉절이 하나에도 감사하게 밥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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