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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0. 2019

남편이 아프다

여전히 갈 곳이 없고, 먹을 것도 없어서 힘들었지만 그 환경에 적응하며 잘 지내고 있었다. 하루가 매일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끼는 편안함이 있었다. 가끔 아이들이 열이 나서 아프거나, 설사를 하거나, 내가 심하게 넘어져 발목을 다치기도 했지만 잘 지내고 있었다. 갈 곳이 없으면 옆집 언니네 집에 놀러 가면 됐다. 가끔 CNG를 타고KFC에 가서 치킨도 사 먹고, 햄버거도 사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거기엔 작은 놀이터가 있어서 아이들도 놀 수 있었다. 소은이를 아기띠로 안고, 지안이 손을 잡고 재래시장을 누비며 아이들 옷이며, 커튼 천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치타공도, 방글라 사람들도 무섭지 않았다. 그들의 언어도 어느정도 익숙해져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그곳의 삶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치타공, 쿨시, 잭프룻 나무


하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여전히 심한 교통체증으로 출퇴근이 힘들었다. 집에 오면 아이들이 자고 있는 모습만 봐야했다. 한국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문화생활은 커녕, 쉴 만한 카페 조차도 없었다. 주 6일 근무, 금요일 하루 쉬는 날에는 교회 예배까지 드려야 했다. (방글라데시는 금요일이 쉬는 날이다.) 7일 내내 쉬는 날이 없었다. 스트레스는 점점 심해졌다. 남편은 점점 살이 빠졌고 심한 두통이 왔다. 두통이 너무 심해 눈을 뜨지도 못하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날들이 발생했다. 큰 병이 생긴 것은 아닌지, 병원에 가서 뇌 CT도 찍어 보았으나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남편은 급기야 어지러움증과 호흡곤란 같은 증상이 생겼다. 몸이 아픈 남편도 힘들었겠지만, 어린 두 아이도 돌봐야 하는데 남편까지 아프니 하루 하루가 몹시도 지치고 힘들었다. 남편이 집에서 쉴 때면 종합 비타민을 섞어 링겔을 놔주기도 하고, 마사지도 해주며 여러가지로 노력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은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아버님도 암으로 항암치료를 하고 있었고, 남편도 아프고,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난 너무너무 아쉬웠다. 아이들과 함께 조금 만 더 방글라데시에 머물고 싶었다.


처음에는 남편의 의지로 이곳에 와서 어렵게 적응하며 지내고 있는데, 그동안 아이들 키운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그냥 떠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힘들게 적응했는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자기야, 난 이제 돌아가고 싶어.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그래, 난 많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니까 내가 아무리 더 있고 싶어도 자기가 힘들면 가야지. 그런데 많이 아쉽기는 하다. 나 이제 적응해서 좀 살만 하거든.”

“그래, 같이 기도해보자.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시기를 바래 보자.”

한국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두고 새벽에 일어나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힘든 환경 속에서도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계속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그날도 어김없이 6시쯤 일어나 함께 기도를 했다. 그날 따라 마음 가운데 평안함이 넘쳤다. 그리고 맘 속에 “다카”로 가야 한다는 강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이 내가 스스로 하는 생각이라면 지워 주시라고 기도했지만, 그 강한 마음속의 울림은 계속되었다.

‘다카에 가도 지금과 같은 삶이라면 우리는 또 힘들어 질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또 한국으로 돌아가려 할 텐데, 왜 다카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다카에 갈 수 있는 방법도 없어요. 거기엔 아는 사람도 없어요.’

이렇게 조용히 고백을 드렸다. 하지만 여전히 ‘다카로 가라’는 마음은 계속되었다. 기도를 마치고 남편과 조심스럽게 기도 내용을 나누는데, 내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온 몸에 전율이 흐르면서 소름이 돋았다. 그 느낌은 내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다. 하지만 남편은 믿지 못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카에 가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도 없었다. 방글라데시를 떠나고만 싶었던 남편은 다카로 가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남편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이곳에 남자고 주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글펐다. 남편이 이곳에 왔기 때문에 따라왔다. 이제 남편이 떠나고 싶어한다. 떠나기 싫지만 난 또 남편을 따라 가야 한다. 내 삶의 방향이 내 뜻대로가 아닌 남편 뜻대로 좌지우지되는 것이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하지만 이 남자와 결혼을 한 이상, 그의 뜻과 나의 뜻이 하나여야 함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한 사람을 통해서만 말씀 하진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같은 곳을 바라보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모든 결정을 남편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 때 어느 헤드헌터에게서 연락이 계속 왔다. 방글라데시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분야의 일이었기 때문에 남편은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다카에 대해 언급한 이후, 남편은 생각을 바꿨다. 혹시 모르니 시도해 보고, 안된다면 미련없이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1차, 2차 면접을 보고 3차 회장님 면접까지 본 후, 최종합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직을 하게 되었다. 반신반의했던 남편도 최종합격이 되어 버리자 다시 방글라데시에서 살아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새로운 분야의 일을 배우기 위해 남편은 한국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남편만 혼자 보낼 것인지, 함께 갈 것인지 고민하다가 앞집 승희 언니에게 집 열쇠를 맡기고 함께 한국으로 떠났다. 3개월이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들 만의 생각이었다.

비오는 날 릭샤, 치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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