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량 Jan 11. 2019

진정한 회복

잠시, 고흥, 친정

11월의 한국은 참 추웠다. 난 두 아이를 데리고 언니네 집들을 왔다 갔다 하며 지냈다. 12월생인 지안이는 이제 막 만 3살이 되어가고 있었고, 소은이는 이제 막 돌이 지나 14개월이 되었다. 남편은 새로운 회사에서 잡아준 숙소에서 생활을 하다 주말이면 우리들을 보러 언니집으로 왔다. 3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교육은 점점 늘어났다. 하루 종일 두 아이를 데리고 언니집에서 지내는 것이 힘들어 질 무렵,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내려갔다.


내 친정은 전라남도 고흥이다. 동네엔 나이 많은 어르신들과 논과 밭뿐이다. 과자를 사러 수퍼마켓에 가려면 차를 타고 20분을 가야 했다. 초등학교 6학년때 떠났던 그곳을 두 아이를 데리고 내려갔다.

어린시절, 유난히도 소심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만이 봤던 아이, 자존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아이, 가족들 앞에선 더욱 작아지는 아이…….

이런 내 모습이 사춘기를 지나고, 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아 해외에서 살아가면서 점점 변해갔다. 점점 덜 소심하고,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고, 용기를 내어보면서 한 명의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 아빠 앞에만 서면 다시 작아지곤 했다. 이미 치료가 된 줄 알았던 나의 생체기에서는 부모님만 만나면 다시 고름이 흘러나왔다.


친정, 시골동네에는 어린아이가 한 명도 없다. 노인들 중에70대 초반인 부모님은 젊은 축에 속한다.

몇 년 뒤면 ‘고흥군’이 사라질 것이라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극심한 노령화로 곧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 곳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7개월을 지냈다.

남편도 없이 두 아이를 데리고 시골에서 지내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호기심의 눈빛을 보냈다.


우리 동네는 내가 어린시절 살았던 모습 그대로이다. 같은 위치에 논이 있고, 밭이 있고 산이 있다. 변한 것은 나이든 동네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자식들이 돈을 벌어 집을 리모델링 한다 던지, 아예 새로 지어진 집이 몇 채 있었다.

고흥, 친정집


내가 어렸을 적 살던 집은 몇 년 전에 불이 나서 재로 변했다. 첫 아이 임신 5개월때였다. 할머니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할머니가 병원에 있는 동안 안방에서 전기합선으로 불이 났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집에 아무도 없었다. 일주일 후 할머니는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쉴 곳이 없어서 옆 동네의 먼 친척 집에서 쉬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겨 준 조의금과 다른 친척들이 도와 준 돈으로 지금의 집을 새로 지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한번도 가지 않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다니고있다. 부모님이 교회 다니게 해달라는 나의 기도가 이루어진 때였다.

다시 새로운 환경에 살게 된 아이들은 엄마 껌딱지가 되었다. 특히 큰아이는 자주 바뀐 환경 때문이었는지 나에 대한 집착이 더 심해졌다. 둘째는 돌때부터 시작된 책에 대한 집착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둘이 번갈아 가면서 울고, 싸우고, 혼 내고의 반복이었다. 처음으로 손주들과 한집에 살게 된 부모님은 아이들의 그런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운다냐. 니가 끼고 살아서 그래.”

“왜 저렇게 엄마만 찾고……. 니가 그렇게 키운거여.”

“니가 하도 다 받아줘서 그래”

배려 육아를 하려고 했던 나는 친정부모님의 그런 말에 마음이 무너졌다. 그리고 다시 내 아이들을 잡고 또 잡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들을 잡으면 아이들은 더 심하게 떼를 썼다. 그런데 난, 내가 받은 환경의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표출하고 있었다.

난 부모님과 한번도 싸워 본 적도 없고, 싫은 소리를 해본 적도 없다. 난 항상 착한 딸 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내 아이들은 그런 내 마음을 몰라줬다. 아이들은 시도때도 없이 사고를 치고, 싸우고, 하루 종일 울었다. 고요한 동네에 우리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날마다 울려 퍼졌다. 동네 어르신들은 우리 집 앞을 지나가다가 한번씩 들러 아이들을 보고 가곤 했다.

“아따, 동네에 애기들이 있으니께 시끌 시끌 하고 좋구만.”

“긍께 말이여. 노인네만 그득한디, 아따 우리 애기들 보니께 좋네.”

“근디. 애기들이 어째 그렇게 운다냐?”

“아따 애기들잉께 그라제. 애기들은 본래 잘 울잖애.”

만3살과 15개월 아이들이면 으레 하는 잠투정과 짜증이었는데, 그걸 받아 줄 마음의 그릇이 비어 있지 않았다. 친정 엄마가 밭에 나가 일을 하면 나도 가서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아이들을 데리고 따라 나서기도 했다. 내 마음의 그릇에는 불안정했던 내면아이의 모습으로 다시 가득 차 버렸다. 여전히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고, 거절하지 못하고, 착해야만 하는 그런 모습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밴드로 대충 붙여 놓았던 내 상처에서 다시 피가 나고 고름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상처의 마지막은 흉터이다. 새 살이 나서 딱지가 떨어지고 나면 흉터는 남지만 그래도 다 치유가 된 것이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새 살이 나기전에 딱지를 내 손으로 떼어 버리고, 떼어 버려서 다시 피가 나고 있었다.

교회 수련회에서, 대학교 동아리에서, 어느 교회 집회에서, 울부짖으며 내 상처를 치유해 주시라고 기도했던 것들이 응답되어 잘 치유 받아 살아가고 있었는데 완치가 아니었나 보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고흥, 해창만


어느 날 밤, 아이들을 재워 놓고 혼자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상담을 받고 싶었지만 그럴 여건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치유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에게 강압적으로 대하고, 밤이 되면 다시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치유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내가 어른이 되어 다시 시골에 찾아가는 상상을 하며 스스로에게 체면을 걸었다.



‘내가 놀던 동네, 엄마를 도와 일을 하던 그 곳, 거기서 선량이를 만났다. 천천히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11살의 선량이를 뒤따랐다. 호기심이 강했지만 그 호기심 보다 혼나는 것이 무서워 아무도 모르게 일탈을 했다. 동네 아저씨가 피우다 버린 담배 꽁초를 주워, 몰래 피워 보았다. 집에 돌아와 휴지를 돌돌 말아서 담배모양을 만들어 그 끝에 불을 붙였다. 휴지 끝에 불이 크게 붙어 하마터면 큰 불이 날 뻔했다. 아빠가 마시다 만 소주를 혼자 홀짝홀짝 마셔보았다. 엄청나게 쓴 술 맛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런 호기심 보다도 아빠한테 혼나는 것이 더 무서웠다. 아빠 모르게 텔레비전으로 어린이프로 만화를 보다가 아빠의 경운기 소리가 들리면 얼른 끄고 후다닥 방에 들어가 숨을 죽였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뭐든지 열심히 하고, 혼날 짓은 하지 않는 너무나도 착한 아이이다. 칭찬받고 싶었지만 아무도 칭찬을 해주지 않아 항상 우울한 아이이다. 그리고 자주 긴장을 했다. 긴장을 하면 소변이 마려워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아이, 콧물이 나지도 않는데 자주 코를 훌쩍거려 엄마에게 혼나는 아이이다.

11살의 선량이는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너 때문이 아니야. 너가 잘못한 게 아니야. 너의 존재만으로 훌륭해. 사랑받아 마땅해. 널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절대 너 때문이 아니야. 괜찮아. 너가 태어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하심 이야. 너가 힘든 거 다 알아. 애쓰지 않아도 돼. 많이 힘들었지? 사랑한다. 선량아…….”

그리고 눈을 떴다.’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번벅이 되어있었다. 너무 위로가 되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나에게 위로해 준 것뿐이었는데 그 위로의 말들이 큰 위안이 되고 치유가 되었다. 그동안 누구에게라도 이 위로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었다. 난 그저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내 존재에도 특별한 뜻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가족들은, 나의 태어남이 슬픔이었다고, 너 때문에 엄마, 아빠가 울었다고, 너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나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작은 먼지처럼 흩날려 작은 바람에도 갈팡 질팡 하던 내 마음이, 이제는 민들레 홀씨처럼 그 바람을 타고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다. 나만의 뿌리를 내려 나만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바로 내 인생의 민들레 홀씨였다.

부모님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그분들도 그 당시에 무척이나 힘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끔 엄마의 힘들었던 삶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40대의 나이에 다섯이나 되는 자녀들을 타지로 보내 놓고 오로지 일만 하면서 살았던 엄마, 남편이라고 있는 남자는 맨날 엄마에게 화를 내고 가끔은 때리기도 하면서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 집안일도, 밭일도 해야 했다. 아빠가 시키는 다른 농사일도 해야 했다. 엄마는 그저 하루하루 버티면서 살았다. ‘세월아 가라, 세월아 가라’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진짜 세월이 이렇게 흘러서 지금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자식들은 모두 시집 장가 가서 다들 큰 일없이 잘 살고 있고, 쉬엄쉬엄 밭일 하며 밭에서 나는 것들을 팔아서 돈을 벌고 있다.


이제는 엄마를 만나면 과거 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엄마의 고단했던 삶, 나의 불안정했던 정서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며 서로를 위로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아빠는 본인이 우리에게 무섭게 했다는 기억이 전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아빠에 대한 기억을 말하면 언제 그랬냐며 되 묻는다. 아빠의 삶 또한 그 당시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난한 집안에 장남으로 태어나 6명이나 되는 동생과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책임져야 했던 그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지, 어른이 되어 두 아이를 키우다 보니 엄마, 아빠의 고달픈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분들도 그분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시대와 환경이 우리 부모님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우리들을 키워낸 것 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분들이었다.


이렇게 상처 가득한 어린 나와의 만남이 있은 후부터 난 자유로워졌다. 그 무엇보다도 내 마음, 감정, 내 아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아무리 주위에서 왜 그러냐며 손가락질 해도 상처받지 않고 내 가치대로 살기로 마음먹으니 상처가 상처로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다. 가끔 기분이 나쁠 때도 있었지만, 마음에 크게 담아두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진정한 회복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한 명의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사는 나라, 인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