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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Dec 28. 2019

6. 착한 사람은 저절로 착한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다시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시간.

"나 집 나갈 거야!”

헝클어진 머리를 하나로 묶고 차가운 물로 대충 얼굴을 씻었다. 로션을 대충 바르고 비비 크림을 얼굴 여기저기에 펴 발랐다. 안방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던 책과 노트, 펜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잠시 고민하다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나 간다.”

“엄마, 어디 가?”

“몰라, 그냥 나갈 거야.”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황망한 얼굴로 내 뒷모습을 보고 있을 아이들이 떠올랐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은 간절하게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엄마가 되기 전까진 내가 꽤나 착한 사람인 줄 알았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힘든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사람. 그래서 인간관계가 꽤나 좋은 편이었다.

간호사로 일할 때 역시 선배들은 날 예뻐해 주었고, 후배들은 날 좋아해 주었다. 비영리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할 때도 대상자들과 사이가 워낙 좋아 선물을 종종 받기도 했었으니까.

어렸을 적에 알게 모르게 받았던 상처들은 성인이 된 후 깔끔하게 사라졌다. 비록 그 상처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형태로 내 몸 여기저기에 붙어있었지만, 괜찮았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고, 보람을 느꼈고, 인정을 받고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 나에게는 조카가 이미 6명이 있었다.(지금은 조카가 10명이다.) 조카들에게 엄청 살가운 이모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는 편이었다. 그래서 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엄마라는 자리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엄마와 이모는 하늘과 땅 차이었음을.

난 그 일도 꽤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처럼 착한 사람으로 살면, 아이들도 나를 착한 엄마, 좋은 엄마로 인정해 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진짜 엄마가 된 후,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엄마라는 역할은 내가 간호사로 있을 때 겪었던 어려움보다 더, 내가 활동가로 일할 때 느꼈던 마음의 고통보다 더, 내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정서적 무기력감 보다 더 힘든 자리였다. 더욱이 내가 아이들을 키운 곳은 방글라데시였다. 아이를 맡길 곳도, 부탁할 곳도, 하다못해 키즈카페도 없었다.


괴물

아이에게 화를 낸다.
아이에게 짜증을 낸다.
아이에게 고함을 내지른다.

나는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괴물이 되었다.
[걱정 말아요! 육아/ 김윤희]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괴물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내 입에서 불을 뿜어낸다. 착한 사람이었던 나는 착한 엄마가 되지 못했다.




부모와 자녀의 자신감에 대한 상관관계를 조사한 교육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자신감이 부족한 부모의 자녀는 자신감 있는 부모의 자녀보다 월등히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한다. 자신감과 자부심이 부족한 부모는 자기도 모르게 항상 남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정해진 관념에 따라 아이를 재단하게 되고 결국 아이는 스스로를 사랑하기보다 남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며 방어적인 사람이 된다. 또한 자신감이 부족한 부모는 아이를 남과 비교하며 닦달하길 좋아하고 쉽게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는 결국 자신의 장점보다는 단점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은 부정적이고 자기 비하에 쉽게 젖어드는 아이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부모혁명 99/구근회]



자존감이 낮고 자신감이 없던 내 어린 시절의 먼지들은 내가 엄마가 된 후 갑자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내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했다. 그리고 아이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난 좌절하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큰 아이가 5살이 되던 해, 잠시 한국에서 지내게 되었다. 난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한없이 늦되어 보였다. 한국의 다른 아이들은 모두 어린이집에 다니고, 놀이 학교에 다니고, 학습지를 하고 있었다. 나도 내 아이를 어느 기관에 보내고 싶었다. 언니 집 근처의 놀이 학교를 알아보고, 미술 학원을 알아보고, 학습지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어느 곳도 보내지 못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내 아이를 그런 기관에 보낼 만한 여유자금이 나에겐 없었다. 그래서 그냥 데리고 있었다. 5살, 3살 아이를 하루 종일 데리고 있으면서 하루에도 여러 번 울컥, 울컥했다.


  과연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과연  키울  있을까?  정말 좋은 엄마가 아닌  같아. 내가   있는  없어….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나였다. 돈벌이도 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보람도 느끼지 못하는 내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아무도 날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화가 났다. 아이들이 하루 종일 엄마만 부르고, 엄마만 쳐다보는 것이 끔찍했다. 난 자존감이 너무 낮은 엄마였다.



“82년생 김지영 영화 보는데, 네가 많이 생각났어. 엄청 울었잖아. 꼭 너 같아서. 나중에 꼭 봐봐.”


둘째 언니가 카톡을 보냈다. 한국에서 한참 이슈가 된 영화인데 난 그 책을 읽어 보지도 않았고, 영화를 보지도 않았다. 내가 보진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올려놓은 감상평을 보다 보니, 이미 내용을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영화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했다. 그렇게 좋은 남편, 그렇게 좋은 시댁은 허구라고 했다. 더욱이 김지영 정도면 괜찮은 정도라고. 그보다 더 못한 상황의 여자들이 훨씬 많다고.

또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 공감되어 눈물이 났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현실과 경력 단절의 여성의 모습이 현실적이라고 했다.


내가 직접 보지 못했기에 뭐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두 의견에 모두 공감이 된다.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를 보는 아내에게 고생했다고 말하는 공유 같은 남편보다, 집에서 편히 애나 보면서 뭐가 힘들다고 그러냐는 남편들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니까.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던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경험하며 경력이 단절되고, 다시 일하기 힘든 현실 또한 사실이니까.



내가 엄마로 살면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돼버릴 때였다. 집안일과 육아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월급을 받을 수 없으니까. 남편이 주는 생활비를 받아 어떻게든 알뜰이 살아보려 노력하는 내 모습을 인정해 주지 않을 때 난 너무나도 슬퍼져 버린다.


뭐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집에서 놀고먹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여전히 인정받고 싶은 선량이었다.  출발이 글을 쓰는 것이었다.



난 여전히 좋은 엄마가 아니다.

겨울 방학 후, 하루 종일 아이들과 붙어있다 보니 더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괴물이 되었다가, 다시 좋은 엄마가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오늘은 급기야 집을 나와버렸다. 그리고 지금, 스타벅스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두 시간,  시간이면 충분하다. 혼자 조용히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다 보면,  다시 좋은 엄마가  것이다.


 웃긴 것은, 아무리 괴물 같은 엄마라도 아이들은 엄마를 사랑해 준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금세 괴물 같은 내 모습을 잊어버리고 엄마를 찾는다. 엄마가 최고라고 말해준다.

이 두 시간 덕분에 먼지 같은 내 낮은 자존감은 다시 조용히 가라앉는다. 제발 당분간은 먼지가 날리지 말기를...


  시간, 아이들과 함께 있는 남편에게 감사를.



이런 부족한 엄마가  아이를 프랑스 학교에 보내며 함께 성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프랑스 학교에 보냈고, 어떻게 적응했으며,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하시다면 

[프랑스학교에 보내길 잘했어/마더북스]를 검색해주세요.


#프랑스학교 #프랑스학교 이야기 #프랑스학교에 보내길 잘했어 #마더북스 


http://m.yes24.com/Goods/Detail/85382388

http://aladin.kr/p/F2jv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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