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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Dec 30. 2019

7. 착한 부자, 어디 없나요?

흙수저가 하는 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어로 ‘귀족의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포에니 전쟁에 참여한 로마 시대의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솔선수범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상류계급의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감을 강조한 말이다. 다시 말해 기득권층의 성장이 노동자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잉여 이익을 함께 나누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초기 로마 사회에서 사회 고위층의 봉사와 기부로 이어졌고, 자발적이면서도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를 통해 로마의 상류층이나 지도층은 시민의 존경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높은 수준의 도덕적 책임감은 그들이 누리는 사회적, 정치적 특혜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던 셈이다. [참고 : 세계사를를보다/박찬영, 버질 힐라이어]



고대에 존재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지금도 여러 가지 형태로 찾아볼 수 있다. 기부를 통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던지, 유명 연예인이 비영리 봉사단체의 홍보대사가 되어 해외봉사를 간다던지, 연말연시를 맞아 보육원 봉사, 연탄배달 봉사 등을 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남몰래 고액 기부를 했다가 나중에 알려져 훈훈한 미담으로 남기도하고, 어떤 이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장애인 봉사활동을 하다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한다. 그러니까 모든 기부활동, 모든 봉사활동이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기부도 봉사도 진심인지 아닌지를 사람들은 판단을 하게 되고, 진심이 아닌 것 같으면 바로 하나의 “쇼”라고 치부한다. 고대 로마시대에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지금에 와서는 부자들(또는 사회 고위층)에게는 부담스러운 말일 것이고, 나 같은 평범한 서민에게는 부자들(또는 사회 고위층)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나 빈부의 격차는 있다. 그 격차가 얼마나 큰 지에 따라 행복지수도 달라진다고 한다.  빈부격차가 크면 클수록 행복지수는 낮아진다.

요즘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빈부의 격차는 점점 커지고, 행복지수는 점점 낮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치를 보지 않아도 사람들의 말과 행동, 사람들이 쓰는 글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국가에서 그 격차를 줄여보려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놓지만, 이미 한번 벌어진 격차는 좀채 좁혀지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 개발 도상국일수록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진다. 내가 살고 있는 인도 역시 그렇다. 그 차이가 어느 정도냐고 물어본다면 사실 잘 모른다. 단지 가장 부자인 무케시 디루바이 암바니(Mukesh dhirubhal Ambani)가 세계 10위 안에 드는 부자인 반면 수만은 가난한 자들은 집이 없어 길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부자들이 어떤 형태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겨울이 된 뉴델리는 밤이 되면 영상 5도까지 떨어지는데, 난방장치가 전혀 없는 이곳에서 느끼는 추위는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그렇다 보니 길거리 사람들은 밤만 되면 쓰레기 등을 태워 몸의 체온을 유지한다. 그렇게 태워진 쓰레기의 나쁜 물질은 고스란히 공기 중으로 유입되고, 세계 최악의 미세먼지 도시를 만든다. 그 미세먼지는 가난한 사람들, 부자인 사람들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 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자인 사람들이 길거리 사람들을 위한 처소를 마련해 준다면, 더 이상 쓰레기를 태울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공기 오염도 덜 할 텐데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왜 모색하지 않는 것일까?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수입에 따라 내야 하는 세금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 많이 버는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야 하고, 적게 버는 사람은 복지 혜택은 받는 구조이다. 그래서 부자들의 불만이 많다고 한다. 왜 내가 낸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하느냐고. 얼핏 보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나 같아도 다른 사람들보다 세금을 많이 낸다면 조금은 억울할 것 같기도 하니까.(아직은 부자가 아니다 보니 그런 일은 없지만) 하지만 한번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나 같은 서민의 수입이 줄어들면 제일 먼저 식비를 줄일 것이고 옷을 사지 않을 것이다. 사치품에 해당하는 것을 사지 않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소비만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빈부의 격차가 커져 나 같은 서민의 수가 많아진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기업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물건을 사는 사람이 없으면 기업의 수입이 줄어들 테니. 결국, 모든 사회가 영향을 받는 것이다. 바로 뉴델리의 모든 사람들이 미세먼지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매우 단순한 내 생각이기 때문에 이론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부자들의 세금과 사회환원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자감세를 통해 기업에게 혜택을 주면 경제가 더 살아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경제는 부자들의 손으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나 같은 서민들이 먹고, 자고, 입기 위해 물건을 소비해야만 기업도 살고 경제도 잘 돌아가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이런 일들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요즘은 복지정책을 지지하고, 서민 경제를 신경 쓰면 바로 좌파라는 프레임을 씌워버리니까.


고대 로마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물리친 스키피오에게는 코르넬리아 그라쿠스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 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아들들을 무척 훌륭하게 키웠다. 어른이 된 그라쿠스 형제는 자신들의 주위에 사치스러게 사는 부자가 있기도 하고,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고 살 집조차 없는 가난뱅이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현실이 불공평하게 느껴졌던 두 형제는 나중에 호민관(고대 로마에서 평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선출한 관직)이 되어 로마 공화정 내에서 자작농을 육성하는 토지개혁과 빈민이나 무산자를 돕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원로원과 보수적인 귀족들에게 밀려 끝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참고: 세계사를 보다./박찬영, 버질 힐라이어)


고대 로마의 모습과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보수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부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 서민들의 울부짖음은 듣지도 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너무 많다. 아마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다 함께 잘 사는 그런 사회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땅에서 농사를 지은 부모님의 자식인 나는 흙수저이다. 내 아이들도 아마 그대로 대물림 될 것이다. 평생직장생활을 해서 돈을 모아도 손에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나 믿고 있는 것은 보험인데, 남편이나 내가 사망하면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도 물가 상승률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겠지만.



하지만 난 부끄럽지 않다.

금도, 은도 결국 땅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아는지?

금수저도, 은수저도 흙수저가 없다면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탈세하지 않는다면, 모두 함께 공생할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한다면, 부자들(또는 사회 고위층) 좋은 평가와 지지를 받을 테고 서민들은 복지혜택을 누리며   편안한 삶을   있지 않을까? 하는 매우 단순한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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