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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5. 2019

낯선 도시, 다카

다카의 낯설음은 기분 좋은 낯설음 이었다

치타공에 2년 반을 사는 동안 다카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방글라데시의 수도이긴 하지만, 거기나 여기나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치타공으로 가기 위해 다카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기다리며 모기에 수도 없이 물렸던 기억은 다카에 대해 좋지않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다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기도 했다. 국내선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나서는 길에, 방글라데시에 처음 왔을 때 보았던 벌떼 같은 인파를 만났다. 그들은 창살을 사이에 두고 공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무리들이었다. 외국으로 돈 벌러 나간 남편, 해외로 공부하러 나간 막내 동생, 그도 아니면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간 보스나 마담을 기다리는 드라이버들일 것이다.

 택시를 잡아 타고 새로운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열이 나고 있었다.


다카공항에서 집으로 가려면 ‘에어포트 로드’를 통해 가야한다. 몇년 전에 새로 정비된 그 길은 넓고 깨끗했다. 몇년 전 중국 주석 시진핑의 다카 방문을 위해 공항부터 숙소였던 시내 중심가 어느 호텔까지  길을 깨끗하게 정비했었다는 말이 있었다.


가끔 그 길이 이유도 없이 막힐 때가 있다. 공항로가 막히면 하나의 길로 연결된 다카 시내의 모든 길이 다 막히게된다.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는데 방글라데시 총리 ‘섹 하시나’가 공항에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길이 막히느냐고?  ‘섹 하시나’가 공항에 가는 날에는 공항로의 길을 몇시간 동안 통제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든 비행기를 타러 가는 날에는 오늘 섹 하시나 총리의 해외일정이 있는지 없는지 꼭 확인해 봐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그녀의 해외순방이 있는 날이면 몇시간씩 길을 막고 차량을  통제하기 때문에 비행 시간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우리가 다카에 처음 온 그날은 길이 막히지 않았다. 치타공에선 CNG, 릭샤먄 타고 다니고 가끔 자동차를 타더라도 시속 30킬로 미만으로만 달릴 수 있었다.(길이 너무 좁고 막혀서 빨리 달릴 수가 없다) 그런데 다카 공항로, 시속 80킬로로 달리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엄마, 차가 너무 빨리 달려. 멀미 나.......


  



한국에 잠시 있는 동안 이용만 박사님을 만났었다.

이용만 박사님은 네팔에서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일할 때 같은 병원에서 활동했던 내과 박사님이다. 우리는 네팔의 벅터풀 병원에서 일을 했다.

벅터풀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차를타고 40분 정도 가야하는 지역이다. 옛날 모습 그대로의 집과 사원, 탑이 존재하는 곳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곳이다.

네팔, 벅터풀


우리가 일했던 벅터풀 국립 병원은 말이 국립병원이지 매우 작고, 깨끗하지 않은 곳이었다. 근처의 서민들을 위한 병원이라고나 할까.......


이용만 박사님은 서울에서 내과 개인병원을 운영하시던 잘 나가는 의사셨다. 그러다 홀연히 방글라데시로 넘어 와 봉사자가 되셨다. 방글라데시에서 4년간 일을 하다 지칠대로 지친 박사님은, 다시 네팔로 가게 되었고, 네팔에서 20년도 넘게 살게 되었다.


2년동안 네팔에서 코이카 봉사단으로 지내면서 박사님으로 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함께 벅터풀 병원에서 내시경을 하고, 박사님을 도와 현지인들의 당료검사를 하기도 했다.

이용만 박사님


내과 병동 간호사들


사모님은 그곳에서 고아원 비슷한 호스텔을 하셨는데, 먼 시골의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공부를 시켜 대학을 보내는 일을 하셨다. 가끔 날 불러 집밥을 먹여주시기도 했다.




우리가 다카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카에 박사님의 딸이 살고 있다며 연락처를 주셨다. 다카에 아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아는 사람이 생겼다.

“내 딸 같은 아이이니까 잘 좀 도와줘라.”

박사님이 박사님 딸에게 했던 말이다. 친딸에게 딸 같은 아이이니 잘 도와 달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그저 웃음이 났다. 너무나 감사했다. 덕분에 낯설기만 했던 다카라는 도시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 박사님의 딸, 화경언니는 결혼하자 마자 방글라데시에 와서 지금껏 살고 있다. 박사님이 네팔로 가기 전 다카에 4년 정도 일을 했을 때, 화경언니가  잠시 방문을 했었다고 한다. 그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결혼까지 하게 되어 지금까지 다카에 살고 있었다. 거의 15년을 넘게 산 언니는 다카 여기 저기 모르는 것이 없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달인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15년 전의 방글라데시는 어땠을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최근에 개발이 많이 되어 큰 마트도 생기고, 길도 좋아졌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15년 전이 더 좋았다고 말하는 분들이다. 살기는 좋아졌지만 그만큼 물가가 오르고 집값이 어마어마하게 올랐기 때문이다.

화경언니는 우리 가족이 다카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카에 막 도착해 아무것도 모르는 날, 유니마트(가장 큰 마트), 코리안 마트, 묵따가차(코리안 유기농 마트)등 여기 저기로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한인 식당에 가서 한식을 사주었다. 다카에서 처음 맛본 한국 식당에서의 한국 음식은 나의 모든 피로를 날려보내 주었다.

언니는 지금도 그곳에서 맡겨진 일들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한인교회 유치부 부장선생님으로,  구역장으로, 학부모 임원으로, 그 자리에서 맡겨진 일들을 묵묵히 하고 있는 언니가 존경스럽다.





다시 새로운 곳에 오게 된 우리는 또 다시 집에만 있게 되었다. 남편의 출퇴근은 치타공만큼 힘들지는 않았지만, 릭샤와 CNG를 타고 다니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여전히 테러의 위험은 남아 있었다. 길도 모르고 무섭기도 해서 밖에 나가지 못했다.

다시 집안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카에 와서도 우리는 날마다 물감 놀이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밀가루를 가지고 놀았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셋이서 숨바꼭질을 하고, 소꿉놀이도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집안에서의 생활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삶이었다.


나중에는 차가 생겨 여기 저기 큰 마트들과 한인 식당에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알고 보니 다카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도시였다. 그만큼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한인 식당, 한인 마트, 심지어 한인 농장도 있었다. 그 농장에서는 한국에서나 구할 수 있는 야채, 쌀, 소고기, 닭고기, 심지어 현미 쌀도 살 수 있었다. 겨울이면 배추와 여러 채소를 주문해서 김장을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떡을 주문할 수 있었다. 다카에서 가래떡은 가장 값진 음식이었다. 다카는 낯선 도시였지만, 기분 좋은 낯설음 이었다.


한번씩 남편이 치타공으로 출장을 가게 되면 치타공에 살고 있는 언니들에게 연락을 했다. 치타공에서는 구할 수 없는 떡과 야채들을 보내주기도 하고, 한인 빵집에서 산 팥 빵을 보내주기도 했다. 치타공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음식들을 보내면서 내 감사한 마음도 함께 보냈다. 치타공에서 언니들에게 받았던 그 사랑을 그렇게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렇게, 기분좋게 다카의 삶을 시작했다.

비오는 날, 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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