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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25. 2019

프랑스 학교 그리고 아이의 강박증

한국 아이들의 프랑스학교 입문기

큰아이 5살, 둘째 3살에 시작한 다카 생활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밖에 돌아다니기 힘들었지만 집안에서 이런저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실삐가 있어서 마음 편히 아이들과 놀 수도 있었다. 여전히 우리는 물감 놀이, 밀가루 놀이, 물놀이를 번갈아가며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큰아이가 6살이 되어 처음으로 국제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래 봤자 오후 1시면 집에 왔지만, 큰아이가 없는 오전 시간을 둘째 소은이와 함께 보냈다. 오빠가 없는 그 시간은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던 것이다.



둘째 소은이가 5살이 될 때 즈음 아이 학교에 대한 고민이 됐다. 일단 아메리칸 스쿨은 너무 비싸서 제외시켰다. 그레이스에는 한국 아이들이 너무 많았고 자리도 없었다.  지안이가 다니고 있는 에벤에셀 스쿨에 입학을 시키려니 한국의 학교와 너무나 흡사한 시스템에 조금 망설여졌다.  뭔가 다른 교육환경을 접해보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프랑스 학교를 알게 되었고, 상담을 하고 바로 입학을 시켜버렸다. 소은이와 함께 지안이도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입학 결정을 하고 학교를 옮기기까지 2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뭐에 홀린 듯 밀어붙였다. 학교를 잘 다니고 있던 지안이에게는 더 미안했지만, 두 아이를 각각 다른 학교에 보내려고 생각하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무모한 도전을 하고 말았다.


프렌치를 한마디도 못하면서, 학교 시스템도 전혀 모르면서,
그냥 무턱대고 입학을 시키고야 말았다.



프랑스 학교로 입학을 결정한 순간부터  아이들과 나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다카 프렌치 스쿨에는 전교생 약 70명 중에  한국 아이가 딱 한 명 있었다. 그것도 중학생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다니기 시작해 지금은 영어와 프렌치 둘 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아이였다.

큰아이는 유치원 과정으로, 둘째는 널서리(어린이집) 과정으로 입학이 되었다. 유초등학년 통 틀어 한국 아이는 우리 아이 둘 뿐이었다. 아이들 반에는 여러 나라의 아이들이 있었다. 일본,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네덜란드 등 여러 국적의 아이들이 있었고  몇몇의 프랑스 아이들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수업시간에는 프렌치로 수업을 하지만 자기들끼리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두 아이는 아침마다 울었다.


한국 친구가 한 명도 없는 낯선 학교에 덩그러니 남겨진 두 아이는 매일매일 힘들어했다. 소은이는 영어도 프렌치도 못하는 아이였고, 지안이는 영어를 아주 조금 아는 수준이었다.( 엄마인 나도 그 당시엔 영어를 전혀 못했다.)

아침마다 교실 앞에서 우는 소은이를 선생님 품에 맡기고 뒤돌아서면 지안이가 엉엉 울고 있었다.

"엄마 집에 가지 말고 기다려. 여기서 기다려야 해."

"알겠어. 기다리고 있을게."

 지안이와 한번 더 눈물의 이별을 하고 교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아이의 우는 강도가 점점 심해졌다. 내 다리를 붙잡고 교실로 들어가지 않으려 애를 썼다.

소은이는 그나마 조금씩 적응을 해갔지만, 지안이는 점점 더 힘들어했다.


언제부턴가 지안이는 손을 자주 씻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왜 저러지? 생각하다 좀 지나면 좋아지겠지,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좋아지지 않았다. 지안이의 손씻는 행동은 점점 심해졌다. 급기야 방금 씻었는데 화장실을 나오다 다시 들어가 씻었다. 1분 마다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는 아이의 손은 거칠거칠하게 변해있었다.

"지안아, 왜 그래?"

"엄마 나도 모르겠어. 내 손이 더러운것 같은 느낌이 들어. 뭐가 묻은 것 같고 냄새가 나."

"아니야 지안아. 안 씻어도 돼."

"응, 근데 자꾸 더러운것 같아. 자꾸 씻고싶어."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이에게 강박증이 온것이었다. 손을 씻고 나오는 아이를 부등켜 안고 엉엉 울었다.

"지안아, 엄마가 미안해. 너무 미안해.  엄마 때문에......"

"엄마 왜 울어?"

"엄마가 지안이한테 너무 미안해서......."


아이들이 학교를 가면 3시에 끝났다. 아이들이 없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6년동안 두 아이를 집에서 돌보느라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갖게된 자유시간은 너무 달콤했다. 뱅골어를 배우고, 영어공부를 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친한 언니들 집에가서 놀기도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스트레스 받는 동안 난 내 삶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이 집에 오면,

"이제 너희들끼리 놀아. 엄마는 엄마일 할거야. 너희들도 다 컸으니 둘이 놀아야지."

하며 놀아주지 않았다. 아이들 둘이 놀라고 하고 난 책을 보거나  공부를 했다. 그러다 둘이 놀다 싸우게 되고,   둘째 소은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난 또 지안이를 혼냈다. 아이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스트레스를 풀지 못했다.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는 아이의 손씻는 행동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한국이었으면 바로 정신과를 찾아갔을것이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에서 갈 수있는 병원은 없었다.  

오롯이 가족의 힘으로 이겨내야했다.

"지안아,뭘 가장 하고싶어?"

"엄마랑 놀고싶어."

"엄마랑 놀고 싶어? 어떻게?"

"예전에 엄마가 놀아준 것처럼 놀고싶어."

"그래. 엄마가 놀아줄게. 무슨놀이 할까?"

이 말에 지안이는 신이나서 하고싶은 놀이를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놀이치료가 시작되었다. 지안이가 가장 좋아하는  레고로 성을 만들어  역할놀이를 했다. 종이접기, 만들기, 미로찾기, 빙고 게임 등, 여러가지 놀이를 날마다 했다. 저녁에 아빠가 오면 이불에 아이들을 올려놓고 그네를 태워주고, 거실로 안방으로 끌고 다녔다. 이불이 더러워지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지안이는 아빠가 오면 싸우기 놀이를 해달라고 했다. 침대 위에서 씨름하고 레슬링하며 노는 것인데 그걸 그렇게 좋아했다. 침대 스프링이 삐걱거리고 먼지가 풀풀 날렸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내 아이가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지안이는 노는 중간중간에도 손을 씻었다.. 하지만 씻지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잡아주고 꼭 안아주기만 했다. 지안이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아이의 손씻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손이 씻고 싶어도 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행히 2주 중간방학이 시작되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는 동안 아이의 증상은 점점더 좋아졌다. 그리고 세 달 후, 아이의 강박증은 사라졌다.


지안이는 항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것을 힘들어한다. 아기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다.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자 강요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강요하지 않아도 아이 스스로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박증이 사라지자 지안이는 서서히 학교에 적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몇의 한국 아이들이 새롭게 들어오게 되었다. 드디어 지안이는 학교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다카 프렌치 스쿨, EFID

지금도 지안이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조금씩 강박증상이 나온다. 하지만 스스로 이겨내는 힘이 자라고있다. 가족이 함께 믿어주고, 사랑을 표현해주고, 기다려주니 아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힘도 함께 성장할수 있었다.

다카 프렌치 스쿨
다카 프렌치스쿨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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