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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Nov 22. 2020

가벼운 선택의 이유

글로 모인 사이

칠판 글씨가 안 보이는 것 같았다. 아예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보이긴 보였지만, 좀 안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고생이라면 자고로 은태 안경 하나쯤은 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공부한 티가 나지.

우리 반 반장은 알이 큰 안경을 썼고, 부반장은 위아래가 슬림한 안경을 썼다. 알이 크든, 작든 간에 안경을 쓴 아이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다.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준이 오빠에게 예뻐 보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준이 오빠도 안경을 썼다. 준이 오빠는 양옆으로 쭉 찢어진 눈에 짙은 눈썹을 가졌다. 매서운 눈초리를 가졌지만, 자세히 보면 장난기가 가득 서려 있기도 했다. 그 오빠가 무테안경 너머로 나를 쳐다보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안경을 하나 써야 할 것 같았다. 중학생 때부터 이마에 나기 시작한 여드름이 점점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콧등에, 턱에, 그리고 볼까지. 화농성 여드름이라도 생기는 날엔 앞머리를 길게 길러 가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고로 여고생이라면 귀밑 3cm…….

나는 귀 위 3cm로 짧게 커트를 하고 학교에 다녔다. 커트 머리와 화농성 여드름을 커버하기 위해서라도 안경은 꼭 필요했다.


준이 오빠처럼 무테안경을 쓰고 싶었지만, 너무 비쌌다. 아니, 테가 없는데 왜 더 비싼 거지? 안경점 아저씨의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가장 저렴한 은테 안경을 맞추었다. 여고생들이 은테를 많이 한 이유는 바로, 가격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난 또 그게 트렌드인 줄 알았지.


애초에 시력이 많이 나쁘지 않았는데 안경을 썼더니 눈이 점점 이상해져 갔다. 한쪽 눈의 난시가 심해지기 시작했고, 한쪽 눈의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눈이 진짜 나빠져 버렸다.




그와 헤어지고 제일 먼저 간 곳은 치과였다. 치아교정을 하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앞니가 살짝 벌어져 있는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비록 내 앞니 때문에 그와 헤어진 건 아니었지만…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내가 일하고 있던 치과였기에 직원 할인을 받을 수도 있었다.


치과 선생님은 교정 말고 라미네이트를 권했다. 치아교정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고생이 심하다고 했다.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선생님이 권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내 치아를 갉아내고 그 위에 치아와 비슷한 도자기를 붙였다. 새로운 앞니가 생겼을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 그와 헤어진 후 내내 울상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종일 웃고 다녔다.


 이왕 예뻐지기로 한 김에 좀 더 예뻐져 보자 결심했다. 다음날 라식 전문 안과를 찾아갔다. 그 병원엔 동기 언니가 일하고 있었는데, 라식 수술을 하고 안경을 벗은 후 새사람이 되어있었다.


“한쪽 눈 난시가 심하네요. 한쪽 눈은 시력이 낮고요. 양쪽 다 하지 말고 시력이 낮은 쪽만 하시죠.”

이번에도 별생각 없이 선생님이 하자는 대로 한쪽 눈만 라식 수술을 했다.



몇 년 동안 썼던 안경을 벗고 두 눈에 힘을 주고 다녔다. 마스카라는 기본이요, 스모키 화장도 종종 했다. 진한 쌍꺼풀과 축 처진 눈으로 늘 졸려 보인다는 말을 들었던지라, 좀 강해 보이고 싶었다. 사실, 샌 언니처럼 보이고 싶기도 했다.



예뻐 보이고 싶어서 아무 생각 없이 저질렀던 과거의 행동들 덕분에 마흔이 넘은 지금은 고생 아닌 고생을 하고 있다. 라식을 했던 눈은 노환이 와서 다시 나빠졌고, 난시는 더욱 심해졌다. 2년 전부터 다시 안경을 쓰기 시작했고, 안경을 안 쓰면 머리가 어지럽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려면 안경 없이 살 수가 없다.


교정 대신 라미네이트를 선택한 결과, 붙여 둔 라미네이트가 한 번씩 깨져 다시 시술해야 한다.

한 번은 꽃게를 먹다 뭔가 뚝 떨어졌는데, 꽃게 껍질인 줄 알고 그냥 버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앞니가 시려서 거울을 보니, 내 진짜 치아가 보잘것없이 웃고 있었다.



젊은 날의 나는 왜 그렇게 가벼웠던지.

뭐든지 쉽게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질 않았다. 먼 미래를 미리 걱정하거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셈하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에 충실하며 살았다.



중년이 된 지금, 가벼웠던 내 결정들이 후회되기도 하지만 그립기도 하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로는 무엇 하나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뭘 하더라도 이것저것 생각해야 하고, 어떤 것이 더 이득인지 헤아리게 된다.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편한 걸 찾게 되고, 나보다 가족들을 더 생각하게 된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 엄마가 되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선택엔 항상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은 어느 것 하나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누가 힘차게 등을 밀어주기를 기다린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겁쟁이가 되는 것일까?


 나이가 더 들어서 모든 결정이 더욱 무거워지기 전에, 다시 한번 나를 위해 가벼운 선택을 해보려 한다.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해서.


그 시작이 이 글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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