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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Dec 19. 2020

3 년동안 쓴 원고가 사라졌다.

백업을 잘 해놓아야 하는 이유

새로운 원고를 준비했다. 몇 번 투고해 봤지만,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코로나 시대의 출판시장은 더 꽁꽁 얼어붙은 것 같다. 아니면 내 원고가 별로였던지.

그래도 괜찮다. 내가 직접 만들면 되니까. 직접 책을 만들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이 있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여유롭게 만든다.


원고 서식에 맞춰 글을 정리했다. 이번엔 직접 그림도 그려 넣어 볼 생각이었다. 비싼 돈 주고 산 태블릿 값은 해야지. 맞춤법 검사기를 돌려 오타와 띄어쓰기를 수정하고, 비문은 삭제하고, 영 아니다 싶은 글은 통째로 삭제했다. 퇴고하는 중에 떠오른 글을 다시 쓰고, 퇴고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좀 더 완성도 높은 책을 만들기 위해 바닥 글도 넣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페이지 옆에 바닥 글 넣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방법을 알아내 보기 좋게 목차와 바닥글을 넣었다. 목차도 다시 정리하고, 레이아웃도 다시 잡고, 내지 편집을 거의 마쳤다.

이제 다시 한번 퇴고하면서 직접 교정, 교열을 보면 끝. 여유롭게 표지에 넣을 일러스트를 그리기로 했다.



학교가 끝난 후 큰 아이는 절친 집에 놀러 갔다. 코로나 때문에 프랑스에 갔다가 몇 달 만에 다시 온 친구였다. 큰아이를 친구 집에 바래다 주고, 둘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둘째 아이의 입이 댓 발 나왔다. 오빠만 친구 집에 놀러 간 게 심술이 난 모양이다. 자기도 친구와 대화 하고 싶다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일본에 있는 친구와 채팅이라도 하라고 내 컴퓨터를 아이에게 맡겼다. 난 주방에서 점심밥을 했다.

“쾅”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이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놀래서 나가보니, 대리석 바닥에 내 노트북이 떨어져 있었다. 설마 하며 노트북 화면을 봤는데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몇 번이다 재부팅 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노트북이 고장 나 버렸다.



노트북이 없어서 펜으로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매일 밤 아이들이 잠들면, 남편의 업무용 노트북에 낮에 쓴 글을 옮겨 적었다.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남편은 39살 생일이 되기 두 달 전에 생일 선물이라며 노트북을 사주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노트북에 글을 썼다.

브런치에 쓴 글부터 혼자 몰래 쓰던 소설까지.

제목과 목차만 잡아 놓은 글부터 여러 번 투고했지만 대차게 까인 글까지.

첫 출간 계약서부터 내가 직접 만든 책의 원고 파일까지.

노트북 바탕화면엔 전업주부였던 내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모든 경로가 담겨 있었다.



수리점에 노트북을 맡겼다. 설마 파일이 날아가겠어? 설마 복구 못 하겠어? 그냥 떨어뜨리기만 한 건데 설마 손상 됐겠어?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모든 의문에 설마를 붙였다.


다음날 노트북을 찾으러 가니, 겨우 몇 개의 파일만 건지고 바탕화면에 있던 모든 파일이 날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아주 깨끗하게 포맷을 해 놓았다.


수리점에서 노트북을 들고나와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때까지 괜찮았던 마음에 폭풍이 일었다. 후회하고 후회하고 후회했지만,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아이는 이미 겁에 질린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내 과거가 모두 사라진 기분이었다.

내가 얼마나 “글쓰기 자료” 파일에 의지하며 살았는지, 그때서야 알았다. 집으로 돌아와 목 놓아 울었다. 울고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어제 끝내 놓았던 원고부터 내가 처음으로 어설프게 쓴 글이 눈에 아른거렸다. 내 눈에 눈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는 줄 몰랐다.



담담한척 했던 거짓된 내 모습이, 애써 태연한 척했던 솔직하지 못한 내 모습이 짜증 났다. 무엇보다 파일을 백업해놓지 않았던 내 무지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파일이 모두 날아간 후, 다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난 후에야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폴라리스 오피스에 들어가 보니, 딱 세 개의 원고가 남아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 공동저서로 쓰고 있던 원고 파일, 그리고 준비 중이던 원고의 퇴고 전 파일.


소중한 파일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이게 어딘가 싶어 소중한 내 아이처럼 조심히 바탕화면으로 가지고 왔다.



새로운 글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노트북에 쓰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의 모든 글은 내 가슴에 묻고, 이제 좀 더 성장한 글과 나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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