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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Dec 21. 2020

휴게소가 그리우면, 버터 통감자를 만들어요.

사소한 감정을 모른척 하지 않기

해외 생활을 한 지 9년 차가 되었다. 처음엔 멋모르고 시작했고, 중간엔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으며, 적응된 후로는 한국보다 해외 생활이 더 좋게 느껴졌다.

그래도 여름휴가 때면 꼭 한국에 가서 먹고 싶었던 음식도 실컷 먹고, 가족들과 친구들도 만나고, 한국의 편리한 교통수단에 감탄하고, 깨끗한 거리에 흥분하고, 먹을 거, 입을 거, 필요한 것들을 잔뜩 사서 들고 왔었는데, 이번엔 한국엘 가지 못했다.



인도의 코로나 상황은 누구나 예상했듯 무섭게 증가했고, 한국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우리는 가지 않기로 했다. 한국에 들어가도 격리할 곳이 마땅치 않았고, 가족들이 있지만, 우리가 가면 민폐만 끼칠 것이 뻔했다. 남편은 여기서 계속 일을 해야 하고,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야 하니.

인도는 위험하지만, 내 집에 머무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3월부터 시작된 럭다운이 5월에 끝나고, 아이들은 온라인 수업을 하고, 남편은 재택근무를 하고, 난 매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들고, 강의를 했다.

12월이 된 지금, 아이들의 학교는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전환 되어 두 달 동안 학교에 다녔다. 다행히도 사건 사고 없이 한 학기를 마무리했고, 겨울 방학을 맞이했다. 남편은 재택근무와 출근을 번갈아 가면서 하고 있고, 난 여전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들고, 강의한다.



한 번씩 그리움이 몰려올 때가 있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진수성찬은 그립지 않다. 길거리 포장마차의 떡볶이, 순대, 오뎅국은 말할 것도 없이 0순위의 그리움이다. 명절 끝나고 꺼내 먹는 명태 전, 언니들과 구워 먹던 삼겹살,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사 먹던 설레임.

그리움의 대상은 아주 사소한 기억의 조각이다.



어제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그리웠다.

서울에서 친정집에 가려면 다섯시간이 걸리는데, 꼭 들리는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는 차를 타고 달리다 지친 영과 육을 진짜 쉬게 해주는 마력이 있는 곳이다.

산악회 아줌마, 아저씨들 틈을 피해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아이들을 위한 돈가스도 하나 시켜주고, 얼큰한 순두부찌개 하나, 뜨끈한 우동 하나를 시킨다. 뜨끈한 국물을 한 스푼 먹으면, 울렁거리던 속이 확 풀어진다.

참고 있던 화장실도 여유롭게 다녀오고, 편의점에 들러 아이들을 위한 마이쭈와 나를 위한 캔커피와 남편을 위한 에너지 음료수를 산다.

그대로 차를 타면 서운하지. 뽑기를 위해 500원짜리 동전을 잔뜩 바꿔 아이들 손에 들려준다. 뱅글뱅글 돌아가다 뿅 나오는 동그란 플라스틱 안에는 없어도 그만인 장난감이 들어 있다.

그게 뭐라고, 아이들은 한 번 더를 외친다. 이게 아이들의 소확행인게지. 휴게소에서는 엄격했던 일상의 규칙이 눈치챌 틈도 없이 스르르 풀어져 버린다.



그때 즈음,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버터 통감자가 오감을 자극한다.

그냥 가면 서운하지. 휴게소에서만 맛볼수 있는 버터 통감자와 맥반석 구운 오징어!

하나씩 사 들고 두 손 무겁게 차를 탄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휴게소를 뒤로하고 달리는 차 사이로 잽싸게 합류한다.



요즘 인도에는 햇감자가 나온다. 햇감자는 칼로 껍질을 벗길 필요 없이 수세미로 쓱쓱 문지르면 껍질이 홀랑 벗겨진다.

작은 알감자를 잘 씻어 껍질을 벗겨 물에 삶았다. 소금도 솔솔 뿌려 준다. 감자가 익으면 물을 버리고, 버터를 넣는다. 버터가 녹으며 고소한 치지직 소리를 낸다. 이때 설탕을 넣어주면 환상의 단짠이 만들어진다. 노릇노릇하게 감자가 익으면 그 위에 파슬리를 휘리릭 뿌려준다. 예쁜 그릇에 담아 아이들에게 내주면, 나는 맛볼 틈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사소한 것이 쌓이고 쌓이면 서운함이 될 수도 있고, 우울증이 될 수도 있다.

그리움이 쌓이고 쌓이면 형수병이 되려나?


한국이 그리우면 눈물 한 방울도 흘리고, 엄마가 보고 싶으면 엉엉 소리 내 울어도 보고, 휴게소가 그리운 날엔 통감자를 만들어 먹으며,

사소한 그리움을 모른 척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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