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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2. 2021

2. 소중한 추억, 에델바이스

랑탕 히말라야 트래킹에서 만난 추억 한 송이

14 , 네팔에서 지냈다. 

명목은 해외봉사활동이었지만 진짜 목적은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익숙한 곳에서는 절대 타오르지 않는 용기가 낯선 곳에서는 작은 불씨로도 화르르 타오르는 법.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여러 용기와 포기, 성공과 실패를 경험을 했고 인연을 만났다.




네팔에는  가지 코스의 히말라야 트레킹이 있다. 가장 유명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코스,  번째로 유명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코스, 그리고   코스보다는  유명하지만  다른 매력이 있는 랑탕 트레킹 코스.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가기 위해서는 카트만두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지만, 랑탕은 버스를 타고 가면 되기 때문에 비용면에서   저렴하다. 4 5 정도의 일정으로도 다녀올  있어서 짧은 휴가 이용해 다녀올  있는 곳이기도 하다.  


네팔에서 지낸지 일년 즈음 지났을  여자 여섯 명이  팀을 이루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다녀왔었다.

이주 정도 되는 코스였는데, 그중  언니는 산을 오르는 도중에 숨쉬기가 힘들어 먼저 하산했고,  언니는 계속 보살핌을 받길 원했다.  짐을 들어주었던 포터와도 약간의 문제가 생겨 산을 오르는  보다도 다른 것들을 신경 쓰느라 피곤했다.



이번에는 혼자 트레킹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체력을 위해 미리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하루에  시간씩 걷기 운동도 했다. 함께 산을 오를 포터도 구해 놓았다.  

그런데 이런 나와 함께 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생겼다.  40, 50대로 구성된 시니어 선생님 팀이었다. 혼자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모를 위험이나 불상사가 걱정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선생님들과 함께  팀을 이루기로 했다.



애초에  혼자 계획한 트레킹에 선생님들이 합류한 것이었기에 모든 일정을 나에게 맞춘다고 했다. 바보처럼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나는 산을 오르는 내내 짐을 들어주는 포터와 함께 앞장서서 걸었고, 선생님들은 아주 천천히 산을 올랐다.

결국 히말라야 산을 오른  3 만에  선생님의 몸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얼굴 한쪽이 마비되어 입이 돌아가는 안면마비, 바로 구안와사가  것이었다.

 

산을 계속 오를 것인지 아니면 정상을 포기하고 내려갈지 결정해야 했다. 이번에도 선생님들은  결정을 따르겠다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정상에 오르고 싶었다. 조금만  오르면 멋진 히말라야의 풍경을   있었다. 하지만 그만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욕망보다 선생님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내가 마흔이 넘은 나이가 되어보니, 선생님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야   같다. 지금 나는 30 이상 걸으면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다. 산은커녕 평지를 오래 걷는 것도 힘들다.  

선생님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산을 오르는 내내 날다람쥐처럼 혼자 앞서 가버리는  보며 얼마나 원망했을까?




산을 바로 내려가기 아쉬워 근처의 평야지대를 둘러보았다. 그곳에서 에델바이스 꽃을 만났다.


 꽃은 아시아 또는 유럽의 고산 지대에선   있는 꽃으로 우리나라에선 서식하지 않는다.

높은 산에서 만난 꽃은 신비스러웠다.  봉우리에 여러 개의 꽃이 모여있는 것도, 이파리에 솜털이 송송  있는 것도.


에델바이스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옛날 알프스 높은 곳에 에델바이스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가 살았다고 한다. 등산하러 올라왔다가 에델바이스를 만난 남자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하게 되었다. 그 소문이 퍼져 여러 남자들이 에델바이스를 보기 위해 산을 오르다 떨어져 죽게 되었다. 그게 너무 슬펐던 에델바이스는 자신의 모습을 꽃으로 바꿔 달라고 신에게 빌었고, 하얗고 솜털이 보송한 별 모양을 가진 에델바이스 꽃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이 꽃의 꽃말은 소중한 추억이다.



랑탕 히말라야에서 이 꽃을 하나 꺾어 왔다.

한국에 있는 남자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함께 보냈다.



네팔에서 고작   교제하고 그는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래서였을까? 애절하고 그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매일 편지를 보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네이트온으로 채팅을 하고, 미니 홈피를 들락거리며 소식을 전했다.  귀국 일정은 아직 7개월 남아 있었다.  

만난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다들 우리가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는 아직 대학생이었다.

졸업도 해야 했고 취직도 해야 했다. 모든 사람이 반대하고, 이루어질  없을 거라고 말하는 사랑에 우리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3년 뒤, 우리는 결혼을 했다.



 문득, 그때 보냈던 에델바이스가 생각나 책장을 뒤져보니, 그에게 보냈던 편지가 아직도 있었다. 조심스레 열어보니, 잊고 있었던 소중한 추억이 한쪽에 남아 다. 



꽃을 한참 바라보며 20대의 나를 떠올려 보고, 그와 나누었던 애정 어린 대화와 편지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함께 트레킹 하느라 고생하셨을 시니어 선생님들이 떠올라 한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팔과 다리가 내 맘처럼 좀체 움직여 주지 않아서 겨우 손가락 열개로 글을 쓰며 추억을 되새긴다.





아이들과 함께 고이 잠든 그를 보며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왔던 노래,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 흠~ 흠흠흠 흠~ 흠 가사도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와 산 세월이 이제 딱 10년 되었다.

연애할 때 가졌던 애틋하고 설렜던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도 나도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말투 하나, 눈빛 하나만 봐도 뭘 원하는지, 마음이 불편한지 알 수 있다.

그건 사랑을 넘어 동지애 같은 것이다.


그와 결혼한 후 방글라데시로, 뭄바이로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뉴델리로 이사 다니느라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을 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한탄을 했다. 하지만 뒤로 무를 수도 없었다.

네팔 히말라야의 정기 때문에 눈에 뭐가 여있었다고 밖에...


대부분의 부부가 우리와 같을 것이라 위안하며 산다. 하지만 그도 나도 서로에게 진심인 것을 안다.



오래 전의 에델바이스가 으스러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옛날의 사랑의 감정이 물씬 떠오른다.

오늘은 그의 어깨를 한 번 더 토닥여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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